* 2017. 12. 23에 열린 제 1회 피터토니 덕톡회에 협력으로 참가해서 배포한 배포본을 웹으로도 공개합니다.
* 크리스마스를 맞이해서 피터와 토니가 독일로 짧게 해외 여행을 가는 내용입니다.
* A5, 19p 분량.
Mistletoe 겨우살이
w. 푸른달
표지 by. 세포 님
❄
하교 시간이 되면 미드타운 과학 고등학교는 늘 삼삼오오 모여 학교 밖을 나서는 학생들과 남아서 운동을 하는 학생들로 떠들썩하다. 그런데 오늘은 한겨울의 찬 공기도 제대로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평소보다 좀 더 들뜬 분위기가 공기 속을 맴돌고 있었다. 아직까지는 공식적으로 방학이 시작되지 않은 학급에 속해있던 피터도 오늘만큼은 눈을 빛내며 담임 선생님의 말에 집중하고 있었다. 이미 하굣길에 들어선 다른 반 학생들이 저 멀리 복도에서 자아내는 재잘거림이 피터의 귀에는 유난히 더 잘 들렸다. 초조할 때마다 나오던 습관이 어김없이 나온다. 금방이라도 뛰쳐나갈 듯이 운동화가 소리 없이 바닥 위를 구르고, 검지는 시간을 재기라도 하는 듯 책상 위를 톡톡 리듬에 맞춰 두드렸다. 끝나라. 빨리 끝나라….
“그럼 다들 방학 끝나고 봐요.”
‘네!’ 학생들의 유례없이 큰 대답이 바로 이어졌고 교실을 채우던 학생들은 재빠르게 복도를 지나가던 학생들의 무리에 섞여들었다. 피터도 다른 학생들과 다를 것 없이 방학을 기다려오고 있었다. 어벤져스에 들어가기를 보류하고 당분간 ‘바닥에 붙어서 지내겠다’고 했지만 여전히 학교 수업이 피터에게 별다른 감흥을 주지 않는다는 것은 매한가지였다. 다행히 예전처럼 수업 시간에 칠판보다 창밖이나 노트북 화면을 보는 시간이 더 길다든가 하는 일은 없었다. 피터는 나름의 깨달음을 얻은 후론 수업 참여도 꽤 열심히 하고, 교내외 활동에 갑자기 빠지는 일도 많이 줄었으며, 친구들과 함께 하는 경시 대회 준비도 차근히 해나가고 있었다.
그래도 방학이 기다려진 이유가 뭐였냐 하면, ‘스타크 인턴쉽’을 더 열심히 한다는 핑계로 아침부터 나가서 숙모와 함께 저녁을 먹으러 들어오기 전까지 보람차게 친절한 이웃 일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방학 숙제 같은 건 금방 끝낼 수 있는 것이었고, 얼마 전까지 있었던 유일한 문제는 숙모를 설득시키는 것이었다. 숙모가 슈트를 버려야겠다고 단호하게 말하는 바람에 슈트를 입은 채로 한동안 이불을 덮어쓰고 실랑이를 벌였다든가, 토니에게 따지려 피터의 휴대폰을 뺏어 전화를 하려고 했다든가, 당장 뛰쳐나가려는 것을 피터가 뒤에서 껴안아서 간신히 막았다든가 하는 크고 작은 사건들이 몇 개 있었다. 어쨌든 피터는 조건부로 스파이더맨 활동을 해도 괜찮다는 허락을 얻어냈다. 오늘부터 뉴욕의 친절한 이웃 스파이더맨은 시민들을 위해 밤낮없이 일할 수 있게 된다.
친구들의 인사를 적당히 받아주며 한 박자 늦게 짐을 챙겨 넣은 피터는 어느새 한산해진 교실을 나와 사물함으로 다가갔다. 피터는 사물함 안에 가득 쌓여있던 묵직한 교재들을 어렵지 않게 한 팔에 안정적으로 받쳐 들었다. 빠르게 사물함 문을 닫자 가려졌던 시야가 트이면서 저편에서 신이 난 표정으로 제게 빠르게 다가오는 네드가 보였다. 저 신나고 들뜬, 동시에 주변을 의식하느라 오히려 더 과장되어버린 표정은 네드가 피터의 비밀에 관한 얘기를 하려고 할 때 짓곤 하는 표정이었다.
“피터. 피터! 방학 잘 보내! 이따가 너희 집 놀러가도 돼? …아, 그리고 언제든 도와줄 준비는 하고 있을 테니까 무슨 일 있으면 신호만 보내라고. 나 너의 ‘그거’잖아?”
피터는 어깨를 으쓱이며 웃어보였다. 네드는 그 날 이후로 뉴욕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면 피터에게 그에 관한 정보를 알려주는 식으로 피터의 일을 돕곤 했다. 학교에 꼼짝없이 있어야 할 때보다는 거미줄을 타고 뉴욕 시내를 누비는 시간이 훨씬 길어질 테니 좀 더 많은 일을 할 수 있을 거라는 기대를 네드도 똑같이 하고 있었다. 하지만 피터에게는 겨울방학을 손꼽아 기다린 이유가 하나 더 있었다.
“미안, 네드. 나 오늘은 ‘스타크 인턴쉽’ 있어.”
“헐. 대박. 스타크 씨가 부르셨어? 또?! 거기다 방학 되자마자 기다렸다는 듯이! 너 그 뒤로 진짜 인정 받았나봐! 이번에도 후기 들려줘. 알았지?”
피터는 미소로 대답을 대신하곤 네드의 넓은 어깨를 손으로 가볍게 두드리며 네드의 옆을 스쳐지나갔다. 스파이더맨의 정체를 알게 된 네드와 숙모가 아직까지 모르는 것이 있다면, 그건 바로 피터와 토니 사이의 관계였다. 피터의 늘씬한 손가락이 휴대폰 액정 위를 바쁘게 배회했다.
『토니, 지금 학교 끝났어요. 오늘부터 방학이에요!』
『방학 축하해, kid. 지금 일이 있어서 마중은 못 나갈 것 같고, 밖에 차 보내놨으니까 그거 타고 이쪽으로 와. - TS』
『토니. 많이 바빠요? 제가 도착할 때쯤엔 일 다 끝나있을까요?』
『아, 그리고 ‘kid’란 호칭 되게 오랜만인 것 같네요! 이제 방학 몇 번만 지나면 ‘kid’란 칭호도 못 쓰실 테니까 그 전까지는 실컷 쓰세요!』
귀엽고 발랄해 보이는 이모티콘을 중간 중간 넣어가며 신나게 즉답을 했지만 기다렸다는 듯이 답장을 보냈던 토니는 그 뒤로 답장이 없었다. 일정 때문에 바쁜 와중에도 학교가 끝날 시간에 맞춰 답장을 보내준 것이라는 걸 알기에 피터는 작은 아쉬움을 담아 휴대폰을 만지작거려보다가 코트 주머니 안에 밀어 넣곤 바삐 걸음을 옮겼다. 문을 나서자마자 겨울의 찬 바람이 발그레하게 물든 볼을 할퀴고 지나갔다.
피터는 겨울을 싫어하지 않았다. 피터는 봄이면 이래서 좋고, 여름이면 이러이러한 면에서 좋고, 가을이면 이러이러한 이유로 좋다고 생각하는 소년이었다. 추억이라는 이름의 앨범을 펼치면 겨울에 접어드는 시기에는 메이 숙모와 벤 삼촌의 손을 잡고 함박눈 내리는 거리를 걷거나 크리스마스 선물을 풀며 환하게 웃는 어린 피터가 있었다. 페이지를 넘기다보면 어느 순간부터는 한 사람분의 미소가 비어있었지만, 슬프지만은 않았다. 새로이 보이는 얼굴들이 피터의 옆을 조금씩 채워나갔기 때문이다.
추위도 피터에게는 별 문제가 아니었다. 거미에 물린 이후로는 체질까지 변한 건지 예전보다 추위도 훨씬 덜 타게 되었고, 추운 날 속옷 한 장에 스파이더맨 슈트만 입어도 이리저리 바쁘게 움직이다보면 추위도 그다지 느껴지지 않았다. 얼음물 같은 호수에 어쩌다 빠지게 되어도 세심한 토니가 추가해준 히터 기능을 사용하면 되는 일이다. 게다가 피터 입장에서는 학교에 다니면서 신경 써야 했던 사소한 문제들 중 하나가 줄어든다는 것도 반가운 점이었다. 어쩌면 주의의 시선을 너무 신경 쓰는 걸지도 모르겠지만-밝은 대낮인 하교 시간에 교문 위를 훌쩍 뛰어서 넘어간다든가, 스파이더맨 마스크를 쓴 상태로 자신이 학생이라는 걸 암시하는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한다는 건 일단 제쳐두고-한 눈에 봐도 달라진 자신의 근육량이나 몸매가 신경 쓰여서 오버 사이즈의 옷을 일부러 입고 다닐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다. 코트나 패딩 자켓 하나면 어느 정도 몸을 가릴 수 있었고 두꺼운 옷을 입으면 확실히 여름보다는 티가 덜 나기 마련이었다.
‘그래도 방학 되면 토니랑 시간 더 많이 보낼 수 있지 않을까요? 아침에는 자고 있는 사람들도 많을 테니까 스파이더맨이 할 일이 별로 없을지도 몰라요! 그러면 그 시간에 데이트 할 수도 있을 거고… 이른 아침엔 사람도 많지 않을 테니까 장소만 잘 고르면 그렇게 눈치 안 봐도 되고요!’
‘그렇게 방학이 좋아? 요새는 예전처럼 학교에 소홀해서 교장실로 불려 간다든가 하는 일은 없는 건 다행스럽긴 한데… 두고 봐. 나중에는 분명 학교 다니던 시절이 그리워질걸.’
‘그래요? 헤헤. 그래도 일하는 사람들이 휴가 좋아하는 거랑 비슷한 거예요. 방학 싫어하는 애는 거의 없을 걸요?! 방학하는 날은 학교 일찍 끝나는 거 아시죠? 그 날 제 애인님이 저랑 데이트 해주셨음 좋겠다아.’
‘꼬맹이의 애인님이 그렇게 바빠? 학생들한테 그렇게 경사스러운 날이라는데 그 날 정도는 시간 내주겠지. 아까 말했던 대로 학교에 발목 잡혀있을 때보단 기회도 많이 생길 테고. 나도 괜히… …아. …….’
‘응? 왜 그래요, 토니?’
‘…아니야. 그냥, 나도 괜히 기대되는 것 같다고 말하려고 했어.’
피터는 느리게 입을 열었다가 도로 다물어버렸다. 작게 들려왔던 말 속에 끼워 넣고 싶던 대답들이 목구멍 속으로 쏙 들어가 버렸다. 붉은 입술을 달싹이는 것만 보일 정도로 작았던 말은 피터의 귀에는 확실히 닿았다.
‘내가 겨울을 기대하게 될 줄은 몰랐는데.’
그 말을 들은 순간에는 단순히 겨울이라는 계절을 좋아하지 않은 건가 생각했다. 하지만 순간적으로 떠오른 표정에는 단순한 ‘불호’와는 다른 어떤 쓰디 쓴 감정이 배어있었다. 겨울은 당신에게 어떤 계절이고, 그 첫 장에는 어떤 기억이 있는 걸까? 찢어버리고 싶어도 엉망으로 뜯어진 자국이 흉터처럼 남아 마음을 아리게 하는 그런 것일까? 피터는 아마 자신이 듣지 않기를 바랐을 작은 속삭임에 대해 자세히 묻지는 않았다. 그의 마음 속 깊은 곳, 아무도 손대지 못했던 여린 마음을 자신이 보듬어주고 싶다는 욕심은 있었다. 호감은 멋진 영웅이었던 아이언맨에 대한 동경에서 시작된 것이지만, 사랑은 금방이라도 쓰러질 듯 위태로우면서도 어떻게든 홀로 버티며 걸어가던 애틋한 토니 스타크의 뒷모습에서 시작된 것이니까. 하지만 멋대로 상처를 헤집어버릴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오래도록 아파왔던 만큼 쓰라림이 무뎌지는 데에는 더더욱 오랜 시간이 걸릴 거란 걸 알았다. 나를 만나기 위해 기다린 시간이 길었으니, 나 또한 기다림을 견뎌낼 수 있어야 하겠지. 피터는 그렇게 생각하며 그저 그의 곁을 지키고 온기를 보탰을 뿐이었다. 그런데.
왜 처음 그와 함께 차를 타고 나란히 앉아서 집으로 향하던 날, 여유로운 웃음 속에서 검은 그을음처럼 눈 밑에 남아있던 상처가 자꾸 눈에 밟히는 걸까.
❄
“크리스마스쯤 시간 있어?”
스타크 인턴쉽이라 쓰고 둘만의 비밀 데이트라 명명하는 시간을 보낸 후 들떠 보이는 피터를 바라보며 토니가 자연스럽게 물었다. 피터는 잠시 당황한 듯 머뭇거리는 기색이었다. 말 한마디 없어도 어떤 생각 때문에 망설이는지 아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저기, 그게, 그러니까, 어…… 되는 대로 입 밖으로 횡설수설 말을 뱉어내는 걸 듣고 있다가 토니는 아무렇지 않은 목소리로 말했다.
“뭘 그렇게 횡설수설 해? 난 크리스마스 당일이 아니라 그쯤 아무 때나 시간이 되는지를 물어본 거야.”
“어…? 아무 때나요? 크리스마스 당일은 말고요…?”
“어차피 아직 공식적인 연인 사이는 아니니까 크리스마스에 오붓하게 데이트 하는 일은 나중을 기약하는 게 나을 것 같아. 네 유별나게 아름다운 숙모가 다른 사람과 크리스마스를 보내는 것보다는 너와 보내는 게… …아냐. 방금 말은 무시해. 아무튼, 토니 스타크도 시간을 내준다는데 방학이라는 학생이 며칠 시간 내는 것 정도야 어렵지 않겠지?”
“당연하죠! 아무래도 숙모가 크리스마스를 홀로 보내게 하기는 그렇지만 다른 날은 얼마든지 좋아요! 데이트 하는 거죠? 으, 아깝다. 데이트 신청 제가 선수 치려고 했는데!”
“오, 저런. 안 됐네. 그렇다면 다른 걸 먼저 제안할 수 있는 기회를 줄게. 난 데이트라고 한 적 없어. 넓게 보면 데이트의 일환이긴 하지.”
“…네?”
이 말을 꺼내기 전까지는 평소와 다름없이 여유로웠던 토니의 얼굴이 잠시 미묘하게 굳었다. 토니를 감싸던 온유한 분위기가 변하자 피터는 이를 금세 알아채곤 어깨를 살짝 움츠렸다. 설마… 안 좋은 일인가? 임무? 엄청나게 위험한 임무 같은 건가? 전에 토니가 말했던 넓은 우주에 존재하는 미지의 위협? 피터의 머릿속에 온갖 나쁜 경우의 수가 떠올랐다 지워지기를 반복했다. 피터의 갈색 눈이 조금 떨리는 동안 토니가 천천히 입을 열어 무거운 소리를 냈다.
“이를테면… 그래, 여행이라든가.”
예상치 못한 토니의 말에 피터는 더더욱 굳은 채로 서있을 수밖에 없었다. 분명 아까의 대화와 연결시켜 생각해보면 피터가 토니에게 같이 여행 가자고 호기롭게 말하면 되는 타이밍-다 된 밥상에 숟가락만 얹는 수준이었지만-이었다. 피터가 생각하기에, 토니와 여행을 떠나는 건 처음이라서 긴장되면서도 설레고, 상상만 해도 행복한 것이었다. 그런데 지금 토니에게서 풍기는 분위기가 자신의 상상과는 사뭇 다르자 피터는 멈칫할 수밖에 없었다. 갑자기 언젠가 방에 들어가면서 얼핏 본 드라마 내용이 떠올랐다. 남자 주인공과 여자 주인공이 이별 여행을 떠나는 장면이었는데, 설마. 설마? 침묵이 길어질수록 피터의 혼란이 깊어질 때 토니가 다시 느지막하게 입을 열었다.
“…저번에 독일 갔을 때 해외로 가는 건 처음이라고 했었지?”
“네? 네…”
“그 때 숙제 하느라 독일 제대로 구경도 못하고 갔다고 했고.”
“숙소… 아니, 호텔 오고가는 길에 좀 구경하긴 했어요. 호텔 구경하고 싶었는데 급하게 슈트 입고 나가느라 못 한 건 좀 아쉬웠지만… 독일에 사는 분들이랑 인사도 나누고 영상도 막 찍었고요!”
피터는 긴장 때문인지 바짝 마른 입술을 안으로 말아 혀끝으로 적셨다. 토니의 눈빛은 여전히 가라앉아 있었다. 그 눈빛이 그와 함께 갑작스레 독일로 가기로 결정됐던 날, 피터가 스파이더맨이 되기로 결심한 이유를 듣고 난 후 보았던 토니의 눈빛과 닮아보였다. 정확히는 몰라도, 그 눈빛에는 수많은 감정들이 뒤섞여있는 것 같다고 피터는 생각했다. 피터는 자신을 만나기 전의 토니가 어떤 일들을 겪었는지, 얼마나 많은 무게를 그 어깨에 짊어왔는지, 그 결과로 그가 현재 어떤 상태인지 자세히 알지는 못했다. 그건 그와 연인 관계가 된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피터는 토니가 다시 입을 열기 전에 부러 밝은 목소리를 냈다.
“토니, 저랑 여행 갈래요? 어… 왠지 모르게 갑자기 첫 여행지는 독일로 하고 싶어졌어요. 이유는 잘 모르겠지만, 그냥 왠지!”
“…영악하긴. 너한테 턴을 넘겨줬다는 걸 잠시 잊고 있었네. 그렇게까지 오버 안 해도 돼. 근데 정말 괜찮겠어? 다른 곳에 가고 싶었을 수도 있었을 거 아냐.”
“괜찮아요! 토니랑 여행 가고 싶다는 생각은 했었는데, 사실 토니만 있으면 어디든 상관없다는 생각이었거든요. 혹시 저희가 오랜, 아, 아니. 그러니까 처음… 만났을 때 갔던 곳이 독일이라서 그래요?”
피터가 중간에 단어 선택 때문에 버벅거리는 사이에 토니는 잠시 과거 언젠가를 헤매었다. 저도 모르게 주먹 쥔 손 안에서 짧은 손톱이 손바닥 주름 안에 파고들어 옅은 아픔을 준다. 사실, 아직은 괜찮지 않았다. 상처투성이인 마음 밑바닥에 무작정 묻어두기만 했던 모든 사실들을 피터에게 아무렇지 않게 말할 자신이 없었다. 그 기억의 끝자락을 들추는 것만으로도 목이 막히고 온몸에 서늘하게 오한이 끼쳐왔다. 토니는 간신히 생각의 흐름을 틀어막고 낮게 한숨을 뱉었다.
“그런 이유도 있고... 네게 언제까지나 모든 걸 숨기고 싶지는 않았으니까. 언젠가 어벤져스에 들어올 거라는 이유도 있지만, 그 전에 넌 내 애인이잖아. 그러니까 적어도 너는, 너만은 알아야 한다고 생각했어.”
피터는 말없이 잠시 숨을 삼켰다. 어렴풋이 짐작은 하고 있었다. 브라운관 너머에서 웜홀 안으로 핵미사일을 등에 이고 홀로 날아가던 자신의 영웅은 자신이 어릴 적 동경하며 막연하게 상상했던 멋진 영웅의 모습만 가지고 있지는 않다는 것을 말이다. 예고도 없이 자신의 집에 찾아와 아무도 모르던 자신의 시크릿 아이덴티티를 아무렇지 않게 말하는 그의 얼굴에는 어디에서 얻었는지 모를 생채기가 있었다.
그 직후, 피터는 영문도 모른 채 단지 ‘토니 스타크’가 가자고 했다는 이유만으로 빈 두 손만 들고 무작정 독일로 따라갔었다. 피터가 생애 처음으로 발 디딘 외국 땅, 그리고 존경하는 영웅 토니 스타크에게 받은 첫 임무. 둘 모두 피터의 머릿속에서는 한없이 긍정적으로 생각되던 것들이었지만 막상 겪어보니 현실은 달랐다. 피터는 어째서 지구를 지키는 영웅들이 편을 갈라서 싸워야 하는 것인지, 같이 차를 타고 가면서 보이는 토니의 옆얼굴이 그렇게 초조하고 불안해 보이는 것인지 정확히 알지 못했다.
‘어떤 상황인지 넌 몰라.’
‘…캡틴이라면 넌 어떤 상황인지 모를 거라고 할 거야.’
차에서 피터에게 읊어줬던 말이 캡틴의 목소리로 똑같이 들려온 순간, 피터는 ‘역시 스타크 씨!’라는 생각을 했지만 한편으론 목구멍에 무언가 걸린 것처럼 껄끄러운 기분이 들었다. 정말로 피터는 아무것도 몰랐으니까. 자신이 원하는 것은 캡틴과 협력해서 나쁜 악당들을 물리치는 것이었지, 캡틴에게 웹슈터를 겨누는 건 아니지 않았는가.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겠지. 하지만 아니야. 틀렸어… 이번엔, 이번만은 틀렸다고.’
토니는 이 말을 하던 순간에는 잠시 평정을 잃었던 것 같아보였다. 짓씹듯 내뱉는 말에는 일순 절박함마저 엿보였다. 눈은 피터도, 차 안의 어딘가도 아닌 조금 더 먼 어딘가를 바라보고 있었다. 캡틴의 어떤 생각이 틀린 것인지 토니는 더 말을 하지 않고 입을 다물어버렸다. 피터도 사이사이에 생략된 많은 것들에 대해 물어보지 않았다. 말하지 않는 이유가 있을 거야. 지금은 내가 할 수 있는 일만 열심히 하자. 그래서 피터는 토니가 했던 말들을 몇 번이나 되새기고, 그대로 충실하게 맡은 바를 해냈다.
독일에서 귀국한 후, 피터의 집으로 가는 토니의 차 안에서 토니는 환하게 웃고, 농담도 하고, 멘토로서 조언과 부탁을 해주기도 했다. 피터는 여전히 토니 옆에서 조금 긴장한 상태로 굳어있었지만, 옆에서 그런 그의 모습을 쭉 지켜보면서 역시 멋있다는 생각을 했었다. 하지만 멋있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피터에게 네가 할 일은 다 했다고 말하며 홀로 사라진 이후로 토니의 눈 아래에 있던 멍은 조금 더 짙어진 것 같았다. 피터는 결국 참지 못하고 토니에게 아주 조심스럽게, 단편적인 부분만을 물었다. 잘 해결되었느냐고. 여전히 모든 상황에 대한 무지 때문에 주어조차 붙지 못한 말이었다. 개인적인 일, 지독했던 사태. 의문은 더욱 깊어졌지만 딱 두어 마디만을 말한 토니는 그 뒤로 미묘하게 가벼운 텐션을 유지했기 때문에 피터는 이번에도 고개만 끄덕였다.
그래도 한 가지만은 물어보고 싶었다. 얼굴에 줄곧 남아있던 멍과 상처, 그리고 그보다도 더 깊어보였던 마음속의 보이지 않는 상처가 자꾸만 눈에 밟혔다. 집으로 돌아간 후에도, 잠들기 위해 침대에 누웠을 때도 잔상이 피터의 머릿속에 아프게 아른거렸다.
‘괜찮아요, 스타크 씨?’
끝내 묻지 못했던 물음에 대한 답을 이제 들을 수 있는 것일까. 피터는 어떻게든 감춰뒀던 상처를 스스로 드러내는 게 쉬운 일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 어머니, 아버지는 어린 나이부터 제 곁에 없었고, 아버지와도 같았던 벤 삼촌은 세상을 떠났다. 빈 자리를 느낄 때면 불시에 눈시울이 뜨거워져 일부러 닫힌 눈꺼풀 아래로 소나기처럼 쏟아지던 많은 감정들을 억누르던 때도 몇 번 있었다. 그래서 피터는 알 수 있었다. 남들에게 괜찮은 모습을 보여준다고 해서 정말로 괜찮은 건 아니다. 다시 말을 꺼내기로 결심하기 전에 얼마나 많은 시간을 생각으로 보내고, 얼마나 긴 밤을 지새웠을까. 피터는 손을 뻗어 토니의 손을 잡았다.
“알았어요. 아까도 말했죠? 토니와 함께라면 어디든 좋아요. 저랑 같이 가요. 어딜 가든 제가 있을게요. 옆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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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터가 늘 그랬듯이 밝은 목소리로 토니의 이름을 부르며 짐을 들고 달려왔다. 캐리어 바퀴가 굴러가며 우당탕 시멘트 바닥 위에 부딪혔다. 한 눈에 봐도 잔뜩 부풀어있는 배낭에, 얼마 전 토니가 사준 캐리어까지 꽁무니를 졸졸 따라오는 걸 보고 어벤져스 컴파운드 밖에서 느긋하게 기다리고 있던 토니가 의아한 표정을 지으며 선글라스를 벗었다.
“피터, 뭘 이렇게 많이 챙겨왔어?”
“숙모 조언도 듣고 인터넷에서 여행 갈 때 필수 물품 같은 것도 검색해서 넣다보니 이렇게 됐어요. 비상약이랑, 왁스에, 보온병에, 세안도구, 우산… 더 많긴 한데 대충 뭐 그런 것들이요. 그리고 아무래도 토니랑 오래 데이트 하는 거나 다름없다 보니까 옷도 조금만 가져가기엔 신경 쓰였고… 흠… …그렇게 많아요?”
“2박 3일이잖아. 이 짐의 반… 아니, 3분의 1만 가져가도 돼. 사실 여권 같은 것만 있어도 가서 지내는 데에는 지장 없어. 넌 가끔 네 애인이 어떤 사람인지를 잊는 것 같아. 과하게 노력하는 모습은 귀엽긴 하지만 웬만하면 짐은 여기에 두고 가.”
결국 피터는 들고 왔던 물건들 상당수를 토니의 방 테이블 위에 가득 늘어놓고 나서야 가벼운 손을 흔들며 떠날 수 있었다. 한결 가벼워져 굴러갈 때도 경쾌한 소리를 내는 캐리어를 끌고 가며 피터는 두 번째로 타는 전용기에 몸을 실었다. 토니가 살아왔던 세계는 피터의 세상과는 많이 달랐기에 처음 겪어보는 것들도 많았다. 일반적인 비행기도 타본 적이 없었던 피터가 전용기만 두 번을 타고, 한 번은 비행기 바깥에서 매달려서 타게 될 줄 누가 알았겠는가. 하지만 피터는 뭐든지 습득이 빠른 청소년기였다.
피터는 엉겁결에 비행기에 탔던 첫 번째 때보다는 토니가 옆에 있어서 그런지 한결 여유로워 보였다-사실 해피와 단둘이 전용기를 타고 올 때도 즐길 건 다 즐기긴 했다. 피터는 토니의 건너편 자리에 앉아 창밖으로 레고 월드처럼 작아지는 세상을 즐거운 표정으로 구경했다. 토니의 시선도 저절로 피터의 시선이 향한 곳과 같은 곳으로 이끌려갔다. 동그란 유리에 코끝을 붙일 정도로 가까이 다가가 앉던 피터가 유리에 뽀얀 숨을 그림처럼 그려내며 재잘거렸다.
“뉴욕에서 높은 곳도 꽤 많이 올라가봤지만 역시 비행기에서 보는 거랑은 또 다른 것 같아요. 엄청 큰 건물도 검지랑 엄지만으로 잡을 수 있을 것 같거든요. 토니는 이런 풍경을 수없이 많이 봤겠죠?”
“아이언맨이 되기 전에도 헬기랑 비행기는 지긋지긋하게 탔으니까. 아직 너는 그렇게까지 높이 올라갈 일은 별로 없었겠지. 바닥에 붙어 지내라는 게 정확히 단어 그대로의 뜻은 아니었지만, 어느 정도 의미가 상통하긴 하니까.”
“저도 이번이 벌써 세 번째예요! 무난하게 두 번 타고, 밖에서… 이걸 탔다고 해야 하나…? 확실히 안에서 보는 거랑 밖에서 보는 건 많이 다르더라고요. 사실 풍경 같은 건 잘 기억도 안 나요.”
점점 차오르는 뭉게구름을 배경으로 배시시 웃어 보이는 피터를 보며 토니는 짧은 상념에 잠겼다. 창밖 풍경을 바라보며 그에 대한 감상을 누군가와 나눈 적이 있었던가? 있다고 해도 아이언맨 슈트를 만든 후 처음으로 비행에 성공했을 때 정도였을까. 토니는 그 전에도 절경이라고 소문난 곳으로 출장도, 휴가도 많이 가봤지만 줄곧 치열하고 바쁘게 살아왔기 때문에 만끽할 여유는 없었다. 어렸을 때는 그 순간을 함께 할 다른 누군가가 없었다. 토니의 넓디넓은 세상이 피터의 삶에 스며들기만 한 게 아니라는 걸 토니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오히려 곳곳이 부서지고 금이 간 토니의 세상에 피터의 삶이 무서울 정도로 깊이 스며들고 있었다.
여태껏 보지 못했고, 느끼지 못했던 사소한-어쩌면 사소하지 않았을지도 모르는-것들을 누리고 기뻐한다는 것이 뭔지 토니는 조금씩 알아가고 있었다. 그런 일들이 이젠 점점 삶의 일부가 되어가고 있어서, 예전으로 돌아가게 되면 지독한 결핍을 느끼게 되지 않을까 하고 생각될 정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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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이 함께 머물게 될 호텔에 도착한 후, 피터는 이제야 비로소 ‘이렇게나 많은 방이 있는’ 곳을 마음껏 둘러볼 수 있었다. 둘이 같은 방을 쓴다는 것을 이상하게 생각할 사람이 있을 경우를 고려해 토니는 둘이 함께 묵을 방 하나와 피터가 묵을 방 하나를 각각 예약했다. 이틀 동안 한 침대에서 함께 눈을 뜨고, 눈을 감게 될 방은 피터의 상상 이상으로 넓었고, 다른 방들과는 따로 떨어져있어 함께 드나들 때 주위를 신경 쓰지 않아도 됐다. 해피와 단둘이 왔을 때는 자꾸 나가자고 재촉하는 바람에 제대로 살펴보지 못했다고 귀여운 불평을 하던 피터는 마트료시카마냥 큰 방 안에서 툭툭 튀어나오는 작은 방들에 ‘우와!’, ‘와!’ 하고 연신 탄성을 내질렀다.
사실 피터와 토니의 여행은 장소만 조금 색다르다 뿐이지 평소 하던 데이트와 크게 다르지는 않았다. 전 세계적인 영웅인 토니는 어느 나라를 가든 시선을 한 몸에 받곤 했기 때문에 둘의 여행 동선은 제한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피터에겐 여전히 익숙해지기 힘든 이런저런 핑계와 거짓말들을 늘어놓을 필요 없이 24시간 동안 온전히 서로의 온기를 느낄 수 있다는 점이 좋았다. 뉴욕을 벗어나 피터와 함께 있는 토니도 몇 가지 생각들을 훌훌 떨쳐낼 수 있다 보니 조금은 어깨가 가벼워 보였다. 살얼음처럼 심장에 박혀있던 독일의 기억이 그를 몰아붙이는 것 같을 때면 찬바람에 휘청거리는 사시나무처럼 불안해보이기도 했지만, 피터가 손을 잡아주면 토니는 흔들리지 않았다. 지지대 같은 마음과 따뜻한 두 손이 있는 것만으로도 토니는 편안해질 수 있었다.
독일에 도착한 지 몇 시간 안 되어 피터는 이국에서 토니와 함께 보내는 시간을 사랑하게 되었다.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다가 어떨 때는 나란히 걷고, 인적이 드문 곳에서는 키스도 하는 그 짧은 순간순간이 모조리 폴라로이드 사진에 담아두고 싶을 정도로 사랑스럽게 느껴졌다. 아직은 대외적으로 멘토와 멘티의 관계 정도로만 알려져 있지만, 나중에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고 당당하게 연애할 수 있는 순간이 온다면 이 장소를 다시 오고 싶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어디를 가든 먹는 것은 최소한으로, 의무적으로나 먹었던 토니와 달리 피터는 뭐든지 잘 먹는 편이었다. 피터가 호텔 조식을 먹는 모습을 보고 토니는 호텔 조식을 이렇게 많이 먹는 사람은 처음 보는 것 같다며 사뭇 신기해하기도 했다. 사랑하면 닮아간다고 했던가. 어쩌면 그건 사랑하는 이를 배려하기 때문에 조금씩 맞춰가는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이루어지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늘 최소 한 끼는 거르기 일쑤였던 토니는 피터와 함께 했던 2박 3일 동안 3끼를 꼬박꼬박 먹게 되었다. 잘 먹는 사람과 함께 하다 보니 자연스레 음식에 손이 갔다.
낮에는 걷다가 이따금 쉬어갈 때면 벤치 같은 곳에 앉아서 브레첼이 든 봉지를 뜯어 피터가 3~4개를 먹을 때 토니는 1개를 꺼내먹는 식으로 간식 같은 것도 자주 먹었다. 크리스마스보다 조금 이른 시기에 갔지만 크리스마스 기분을 낼 겸 레스토랑에 가서 삶은 감자, 크뇌델을 곁들인 거위 요리로 포식을 하기도 하고, 독일이라 하면 떠오르는 소시지가 가득 담긴 접시를 사이에 두고 피터는 콜라, 토니는 맥주가 든 잔을 서로 부딪치며 얘기를 나누기도 했다.
보란 듯이 연인들의 유명한 데이트 명소에 갈 수는 없었지만, 워크샵이나 견학 같은 목적으로 포장될만한 곳이면 어디든 상관없었다. 피터는 늘 괜찮다고 말했지만, 토니는 자신의 명성 때문에 피터가 본디 누렸을 ‘평범한 삶’을 포기할 때마다 돌 한 덩어리를 억지로 삼켜낸 것처럼 마음이 아팠다. 그래서 둘이 함께 가고 싶은 곳을 고를 때, 토니는 피터가 좋아할만한 곳, 피터가 가고 싶어 할 것 같은 곳을 우선적으로 골랐다.
그 중에서도 미니어처로 가득 찬 함부르크의 미니어처 박물관에 갔을 때, 피터는 아이처럼 신나고 들뜬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피터가 어렸을 적 레고로 만들던 작은 마을보다도 훨씬 큰 세계가 거기에 있었다. 꼬맹이가 견학 오기엔 딱 맞는 곳이라고 너스레를 떠는 토니의 옆에서 피터는 연신 두리번거렸다. 독일로 올 때 이륙하던 비행기에서 봤던 것과 비슷하면서도 좀 더 환상적인 느낌이 강한 풍경을 한 눈에 바라보다가 피터는 문득 말했다.
“사실 토니 연락을 기다리던 2개월 동안에, 음… 타워 근처에 몇 번 간 적이 있었거든요. 그러니까, 팔리기 전에요. 혹시 제가 할 일이 생긴다면 당장 달려가려고 근처를 서성거렸던 거지만, 사실 그렇게 주변을 맴돌고 있으면 토니가 한 번 정도는 절 보러 와주지 않을까, 찾아주지 않을까 생각도 했던 것 같아요. 어쨌든 타워보다는 훨씬 낮은 건물 위에 있을 수밖에 없었지만, 타워를 보면서 그런 생각을 했어요. 토니는 항상 이렇게 높은 곳에서 세상을 내려다보고 있겠구나. 어쩌면 눈으로 보이는 높이보다 더 높은 곳에서 세계를 바라보기 때문에 그런 멋진 사람이 될 수 있었던 게 아닐까 생각도 했고요.”
“네가 타워 근처에 몇 번 왔었다는 건 프라이데이가 네 활동 반경에 대해 종종 보고 해줘서 알고는 있었어. …왜 그렇게 놀라? 몰래 맛있는 거 먹다가 들킨 강아지 같네. 워싱턴 갔었을 때부터 알고 있던 거 아니었어? 위치 추적 기능 있었다는 거. 더 높은 곳에서 세계를 바라본다, 라…….”
토니는 시선을 내려 오밀조밀 모여 있는 작은 건물들을 응시했다. 그렇게 생각했던 적이 있었지. 어쩌면 그건 나의 오만이 아니었을까? 토니는 항상 미래를 예측하고 대비해왔고, 그 예측은 현실에 대해 제대로 파악하고 있다는 사실을 전제하고 있는 것이었다. 그런데 지금은 어떻지? 더 나은 미래를 위해 발버둥 치던 행동들이 고스란히 제게 부메랑이 되어 날아올 거란 걸 예상한 적이 있었던가. 다시금 손끝으로 시베리아의 한기가 스멀스멀 마귀처럼 기어 올라와서 토니는 애써 주먹을 말아 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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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에는 미국에서 좀처럼 보기 힘든 유럽 특유의 예스러운 분위기가 있었다. 독일에서의 마지막 밤, 호텔로 돌아오는 길에 예전 모습이 고스란히 남아있어 한 폭의 그림 같은 주택가를 거닐다보니 군데군데 걸려있는 겨우살이 장식들이 눈에 띄었다. 아마 크리스마스를 맞이해서 미리 장식을 해둔 것이리라. 한 주택의 대문에 앙증맞게 걸려있는 겨우살이 장식을 향해 잰걸음으로 다가갔다. 크리스마스에 겨우살이 밑에서 연인이나 부부가 키스하면 행복해진다든가, 영원한 사랑을 얻을 수 있다는 말은 유럽에서부터 시작된 것이지만 미국에서도 여러 매체에 활용될 만큼 제법 유명한 것이었다. 피터도 그 사실을 익히 들어 알고 있었다.
피터는 저도 모르게 도르륵 눈을 굴려 농익은 겨우살이 열매만큼이나 붉은 토니의 입술을 응시했다가 얼른 눈을 뗐다. 하지만 눈치 빠른 토니는 그새 피터의 얼굴에 여과 없이 드러나는 속마음을 눈치 채곤 빙그레 웃으며 다가왔다.
“키스 하고 싶어? Darling.”
“헉. 네? 아, 아니. 그게.”
“네가 생각한 게 이건지는 모르겠는데. 크리스마스에 겨우살이 밑에 있는 사람에게는 키스해도 된다는 거. 이거 생각한 거야? 여기도 나쁘진 않지만 유감스럽게도 프라이데이가 보는 눈이 있다고 경고해줘서 말이야.”
토니는 빠르게 시무룩해진 피터의 모습을 선글라스 너머로 느긋하게 바라보다가 손을 입가로 가져가 손가락 끝에 가볍게 입을 맞췄다. 입술의 온기가 남아있는 것만 같은 손끝이 제 입술에 닿았을 땐 피터도 흠칫 놀랄 수밖에 없었다. 손가락이 닿았던 순간은 찰나였지만 느낌은 오래도록 남아서 피터는 본능적으로 토니에게 키스해버리지 않기 위해 손등으로 입술을 꾹 누르고 있어야 했다.
“나머지는 호텔 돌아가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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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니, 먼저 씻고 나오세요!”
피터가 말하지 않아도 옷을 벗고 샤워 부스에 들어갈 채비를 하던 토니는 오히려 피터의 망설임 없는 말에 머리 위로 의문 부호를 띄운 채로 고개를 기울였다. 그제야 피터가 조금 당황했음을 드러내며 습관적으로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어제만 해도 토니가 샤워를 하러 들어가자 함께 씻어야 하나, 그렇다면 먼저 같이 씻자고 말해야 하나, 부담스러워 하시면 어쩌나, 아직은 그런 걸 할 나이가 아니니 참아야 하나 혼자 갈팡질팡 하던 모습이 꽤 귀여웠는데. 오늘은 그런 고민들은 말끔히 사라져버렸다는 양 굴고 있으니 꽤나 의외였다. 의문이 생기긴 했지만 뭔가 다른 생각이 있는 건가 싶어 토니는 군말 않고 그대로 샤워 부스로 들어갔다. 짧게 샤워를 하고 나오자 피터의 뺨은 어쩐지 발갛게 상기되어 있었다. 이 역시 눈치 챘지만 토니는 따로 언급하지 않았다.
피터도 간단하게 씻고 나온 후에, 토니는 사뭇 진지한 표정으로 침대에 앉아 있다가 피터를 위해 자연스럽게 비워둔 옆자리를 손으로 가볍게 톡톡 두드렸다. 아, 그 얘기를 하려는 거구나. 이틀의 시간 동안 소중한 추억들을 많이 쌓고, 그 추억들을 마음에 깊이 남은 상처에 바르는 연고 삼아 토니는 용기를 낼 생각인 것 같았다. 피터는 빠르게 옆자리에 앉아 한 손을 그의 손 위에 포갰다. 방은 따뜻한데도 이상하게 손은 서늘한 느낌이 들었다. 토니는 선뜻 말을 꺼내기가 어려운지 피터가 나오기 전에 미리 와인을 따라둔 와인잔 스템을 쥔 손을 가볍게 움직이며 한동안 뜸을 들였다. 술기운을 빌자 어렵사리 낮은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늦은 밤부터 시작된 토니의 이야기는 길었다. 토니를 거실에서 마주했던 날의 피터가 몰랐던, 상상하기 힘들었던 토니의 모습들. 그를 둘러싼 일들은 가끔 듣는 피터마저도 숨 막히게 느낄 정도였다. 학교에서 배웠던 소코비아 협정을 둘러싼 갈등, 소코비아 사태 피해자들의 갈 곳 잃은 분노, 의견 차이로 결국 갈라지고 만 어벤져스 사이에서 고뇌하던 토니, 지모의 개입으로 인해 생긴 돌이킬 수 없는 균열. 토니가 어떻게든 어벤져스 와해라는 최악의 결과만은 막고 싶었던 것까지.
“그게 네가 너를 찾아갔던 이유야. …아니, 그 이유 때문만은 아니지만. 너도 알다시피 난 그 이전부터 네 존재를 인지하고 쭉 지켜보고 있었으니까. 그리고…….”
…시베리아에서는. 이어지는 말이 다시금 말문이 막혀버렸다. 다른 어떤 일들보다도 토니에게 더 큰 상처로 남았던 날. 아슬아슬하게 붙잡고 있던 실낱같은 희망마저 잔인하게 끊어져버렸던 순간. 웜홀과는 다른 의미로 자신을 속에서부터 철저하게 망가뜨려버린 그 장소. 숨이 조금씩 거칠어졌다. 시베리아에 돌아온 이후로 미래에 대한 걱정은 더 깊어졌지만 사실상 혼자였던 토니는 그에 대한 대비를 홀로 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토니는 쉼없이 위험 요소를 찾고 분석하며, 무언가를 만들었다. 공황 장애를 극복하게 했던 그 방법은 효과가 아예 없지는 않았지만 완전한 해결책도 아니었다. 시리도록 차가운 기억은 가끔 토니를 숨 막히게 만들고, 밤을 지독히도 길게 만들었다. 시베리아 한복판에 홀로 남겨졌던 그 날처럼 몸이 가늘게 떨렸다. 나는, 나는 무엇을 위해…. 익숙하게 숨이 막혀올 때,
“괜찮아요, 토니. 저 여기 있어요. 토니 옆에. 그러니까 괜찮아…”
술기운보다도 따스하고 안정적인 온기 안에서 토니가 힘들게 숨을 몰아쉬었다. 공황 장애 증상으로 나타난 적은 없었지만, 홀로 견뎌오면서 억지로 틀어막고 있던 감정들이 한꺼번에 흘러넘쳤다. 그래도 울지는 않았다. 누군가의 품에 안겨 울고 위로받는 법을 배운 적은 없었다. 그래서도 안 된다고 생각했다. 어느새 더 넓어진 것 같은 피터의 어깨의 이마를 맞대며 토니는 느릿하게 말을 이어나갔다. 다시 캡틴과 협력하기 위해 찾아간 곳에서 알게 된 뜻밖의 진실, 배신감, 잔혹한 싸움과 그 결과까지.
피터는 얼마나 많은 시간이 걸리든 그저 토니의 등을 손바닥으로 찬찬히 쓸어주며 묵묵히 이야기를 들어줬을 뿐이었다. 정말 자신은 아무것도 몰랐구나, 싶었다. 그저 토니를 도울 수 있다는 사실과 앞으로 그와 만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에 들떠 자꾸만 눈과 마음에 밟히는 그의 상처들을 제대로 보지 못했다. 어린 아이 취급하던 시절이 싫었던 때도 있었지만, 돌이켜 보면 자신은 확실히 토니에 비해 한참은 어렸다. 몸도, 마음도. 하지만 그를 만나면서 무서울 정도로 빠르게 성장하는 것을 느낀다. 피터는 이 모든 게 다름 아닌 토니 스타크라는 사람과 만났기에 가능한 일이라 생각했고, 그렇기에 감사했다.
이야기가 끝난 후 침묵 속에서 피터가 토니를 한참 동안이나 안아주는 사이에 토니의 숨소리는 조금씩 안정을 되찾았다. 천천히 피터의 품에서 고개를 들자 드러나는 토니의 잔잔하게 가라앉은 두 눈에는 상처가 엿보였다. 어떻게 위로해줄 수 있을까 짧게 고민도 했지만, 토니가 느꼈을 감정과 고통을 감히 이해한다고 말할 수 없을 것 같다고 피터는 생각했다. 모든 아픔은, 당사자가 아닌 이상은 완벽하게 알 수는 없다. 피터가 벤 삼촌을 잃었을 때의 심정을 친구들 누구도 알 수는 없는 것처럼 말이다. 섣불리 말 몇 마디를 하는 대신, 피터는 아까 전에 준비한 서프라이즈 선물을 협탁 서랍에서 주섬주섬 꺼내들었다. 토니가 말없이 그 선물을 바라보다가 참으로 오랜만에 웃음을 터뜨렸다.
“…설마 샤워하는 사이에 이거 가져왔던 거야?”
“멀지 않은 곳에 있어서 다행이었어요! 아까 못했던 거 하자고 하셨잖아요. 아까 토니가 말한 거랑은 좀 다르지만, 크리스마스에 겨우살이 밑에서 키스하면 행복과 영원한 사랑이 이루어진대요. 꽃말은 강한 인내심이고. …저랑 행복해지는 마법의 주술을 하려고 그간 그렇게 먼 길을 돌아온 거 아닐까요?”
피터는 웃으며 겨우살이 묶음을 쥔 손을 들어 둘의 머리 위에 겨우살이를 피워냈다. 그 행동이 귀여워 토니가 다시 한 번 조금 젖은 웃음소리를 내곤 가까이 오라는 듯 손가락을 까딱였다.
“우리는 오늘이 크리스마스니까. …메리 크리스마스. 피터.”
영원한 사랑과 행복을 마음속으로 기원하던 피터의 머릿속에 작은 종소리가 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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