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회색도시 1의 전반적인 내용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스포 주의해주세요!
* 페러렐 월드 + if 설정이 있습니다. 원작 스토리를 조금 변형했습니다.
* 회색도시 1 대사 인용이 다소 있습니다.
* 하편의 상황은 상편과는 다른 페러렐 월드에서 일어나는 일이라는 설정입니다.
+마지막 문단에서 한 문장을 빼먹어서 뒤늦게 수정했습니다ㅠㅠ
♪ CASG - Till I Die (nZk ver)
‘당신을 많이 사랑해요’와 ‘당신을 많이 사랑했어요’
그리고 ‘당신을 영원히 사랑할 거예요’와 ‘당신을 영원히 사랑하려고요’ 사이에는
서로 다른 사랑의 세계가 존재한다.
/프랑수아즈 사강, 길모퉁이 카페
“시백 씨?”
부드러운 목소리가 이름을 재차 불러온다. 시백은 제 위로 쏟아져 내리는 빛무리에 눈을 제대로 뜨지 못하고 게슴츠레하게 떴다. 아직은 가느다랗고 좁은 시야에 익숙한 얼굴이 보인다. 햇빛을 받아 옅은 빛을 내는 머리칼과 부드럽게 휘어진 눈매. 따스한 봄바람을 닮은 그 모습을 보며 시백은 잠에 취해 웅얼거렸다. 아, 선생님이구나. …잠깐, 선생님이라고?
“서, 선생님?!”
시백은 허겁지겁 일어나 자세를 고쳐 앉았다. 제멋대로 흐트러진 앞머리가 시야를 일부 가리자 급한 대로 입으로 바람을 훅 불어 날려버렸다. 그제야 선명하게 보인 준혁은 눈을 둥그렇게 뜨고 놀란 표정을 짓고 있었다. 시백은 그제야 자신이 있는 장소가 어디인지 깨달았다.
준혁의 흥신소는 정리를 해도 어딘지 모르게 어수선한 느낌을 주는 시백의 도장과는 썩 다른 느낌을 줬다. 청소의 요정이 남몰래 청소를 해주고 가는 것인지, 아니면 사실 선생님이 청소의 요정인지는 잘 모르겠지만-시백은 여러모로 후자라고 생각했다-시백이 올 때마다 이 장소가 어질러져 있던 적은 거의 없었다. 딱 한 번, 누군가에게 털렸을 때를 제외하고 말이다. 시백도 그 난장판을 발견한 현장에 함께 있었지만, 그 난장판은 오래 가지 않아 준혁의 손에 의해 언제 그랬냐는 듯 원 상태로 되돌아갔다. 꽤 다급한 상황이었음에도 자연스럽고도 신속한 움직임으로 정리를 시작하는 준혁을 보고 감탄하다가 뒤늦게 엉거주춤 그를 도왔던 기억이 났다. 아마 블라인드가 쳐지지 않은 창문 너머로 따스한 볕도 들어오고, 방 곳곳에서 느껴지는 그의 체취에 취해 몸이 노곤하게 풀리며 저도 모르게 잠들어버린 것 같았다.
“아니, 그게… 죄송합니다, 선생님! 놀라셨어요?”
“그렇게 놀라진 않았습니다. 혹시 시백 씨가 악몽이라도 꿨나 싶어서.”
시백은 괜히 머쓱해져 습관적으로 뒤통수를 긁적였다. 그 습관에 담긴 시백의 감정이 무엇인지 알고 있다는 듯 준혁은 옅게 미소 지어보였다. 악몽을 꾼 것은 아니었다. 그렇다고 엄청난 길몽이나 기분 좋은 꿈을 꾼 것도 아니다. 다만 꿈을 꿨다고 하기엔 지나치게 묘연한 감각이라 생각했다. 원래 꿈은 일어나는 순간에도 곧잘 잊어버린다고는 하지만 그것과는 조금 달랐다. 하지만 아무리 머릿속을 헤매어 봐도 실체가 보이지 않는 뜬구름을 잡아서 무얼 하겠는가. 시백은 금세 그 생각을 머리에서 지워버렸다.
버벅거리던 시백은 잠이 조금씩 깨자 말을 멈추고 멍하니 준혁을 바라봤다. 깔끔한 소라색 니트 안에 깨끗한 와이셔츠의 단추를 두어 개 풀어헤친 것이, 시백이 봐왔던 준혁의 이미지와 꼭 맞았다. 의도한 것은 아니겠지만 오늘-4월 5일, 준혁 선생님의 생일이자 식목일-과 어울리는 색 배합이고, 무엇보다 그와 아주 잘 어울렸다. 동시에 그 옷차림은 한결 편한 느낌을 주기도 했다. 준혁이 평소 입던, 일할 때의 복장보다는 캐주얼한 느낌이라서 그런 걸까. 기분 탓, 혹은 착각일지도 모르지만 옷차림에서 보이는 이런 작은 변화도 관계의 발전으로 느껴져 시백은 가슴이 설렜다. 그만큼 그와 함께 하는 시간이 조금씩 쌓여가고 있다는 증거이기도 했다. 시백의 시선이 향한 곳을 보고 준혁도 머쓱한 미소를 지어보였다.
“어색한가요? 시백 씨는 이런 옷을 입은 걸 처음 봤을 수도 있겠군요. 워낙 곤히 자서 깨우는 게 맞을지 잠깐 고민했을 정도였습니다. 너무 무리하진 마세요.”
시백은 그의 말이 끝나자마자 두 번의 부정을 함축하듯 고개를 세차게 저었다. 아무리 그래도 오늘 데이트 할 생각에 어제 거의 잠을 설쳤다는 걸 말하기엔 쪽팔렸다. 지난 새벽, 1시간 넘게 고민하던 생일 축하 메시지를 자정을 기하여 보낸 후 시백은 머리로 송판을 깨고 싶은 욕구를 애써 참아야 했다. 만약 전화로 얘기했다면 횡설수설 헛소리만 잔뜩 하다가 통화가 끊어지고 정말 송판 몇 장을 연달아 머리로 깨버렸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생일 축하합니다, 준혁 선생님! 축하해드릴 겸 내일 잠깐 만나주실 수 있어요?]
[오늘 벚꽃이 예쁘게 폈더라고요. 혹시 괜찮으시ㄷ]
오지 않는 답에 홀로 조마조마 하며 뒤에 이을 메시지를 미리 입력해두다 실수로 전송 버튼을 눌러버린 순간을 생각하면 지금도 모골이 송연해진다. 거짓말을 이렇게 쳐도 욕먹을 텐데 시백은 그 실수를 실제로 저지르고 만 것이다. ‘나 연애 안 해봤어요’를 이렇게 각양각색의 방식으로 드러내기도 힘들겠다. 그래도 이렇게 갑작스러운 데이트 신청이라니, 선생님이 불편해하시지는 않을까. 이젠 날 피하려고 할지도 모른다는 생각까지 들었다. 온갖 잡다한 걱정들 속에서 도착한 준혁의 답신엔 특유의 다정함이 느껴졌기에 시백은 그나마 걱정을 덜 수 있었다.
[축하해줘서 고맙습니다, 시백 씨. 내일 볼 일이 있기는 하지만 일찍 끝낼 수 있을 것 같으니 점심시간쯤엔 시간이 날 것 같습니다.]
[1시쯤에 제 사무실로 와줄 수 있습니까? 그러면 얼추 시간이 맞을 것 같군요.]
메시지를 받은 시백은 일단 거절은 아니라는 것에 크게 안심했다. 그렇지만 역시 선생님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잘 모르겠단 말이야. 시백은 몸을 움직여 다시 자세를 바꾸곤 제 옆에 앉아있는 그를 내려다봤다. 그도 앞으로 자신과 함께 보낼 시간을 데이트라고 생각할까, 아니면…. 시백은 자꾸만 밀물처럼 밀려와 그의 머릿속을 치는 생각들을 털어내고 부러 쾌활한 목소리를 냈다.
“생일 축하드려요, 선생님! 일은 다 끝나신 거예요?”
“오래 걸릴 일도 아니었습니다. 생각보다 조금 오래 걸려서 늦긴 했지만요. 기다리게 해버렸군요.”
“아닙니다! 괜찮습니다!”
늘 그랬듯이 괜찮다며 허세를 부리는 시백을 바라보던 준혁이 꺼낸 다음 말에 시백은 심장이 떨어진다는 것이 무슨 느낌인지 알게 됐다.
“그래서, 어딥니까? 시백 씨가 봐뒀다는… 벚꽃이 예쁜 곳은.”
*
주말이라 그런지 남산에는 사람이 많았다. 시백은 준혁과 처음 만났던 장소도 남산이 바로 보이는 곳이라 더더욱 이 곳이 가장 먼저 떠올랐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했다. 준혁의 옷 색과 비슷한 맑은 하늘에는 솜사탕 같은 구름 몇 개만 떠있어서 화사한 색감의 벚꽃과 잘 어우러졌다. 시백은 차에서 내리는 준혁의 옆얼굴을 조심스레 곁눈질 했다. 벚꽃이 흐드러지는 거리를 바라보는 그의 눈은 어딘가 공허해보였다. 어쩌면 그의 눈은 이곳이 아닌 다른 어딘가, 혹은 다른 언젠가를 보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 순간, 흩날리던 분홍 꽃잎을 담고 있던 준혁의 동공이 잘게 떨리는 것이 보였다. 이젠 슬프게도 익숙한 모습이었기에 거의 동시에 시백도 자리를 박차고 준혁에게로 달려갔다. 시백이 급하게 그를 부축할 때쯤엔 준혁은 가슴을 움켜쥔 채로 낮은 신음을 흘리고 있었다. 고통으로 갈라진 목소리가 약을 찾았다. 급하게 가방에 넣어둔 생수병과 약봉지를 꺼낸 시백이 그의 마른 입술 사이로 물을 흘려 넣으며 약을 그의 손에 쥐어주었다. 목울대가 약하게 한 번 움직이고 나서야 시백에게 전해지던 떨림이 잦아들었다.
“준혁 선생님, 괜찮으세요?”
“…네. 감사합니다. 이젠 괜, 찮습니다….”
일렁이던 준혁의 시야가 바로잡히자 미처 감정을 숨기지 못하고 얼굴을 구기고 있는시백이 보였다. 그 모습이 애틋함을 불러와 준혁은 저도 모르게 손을 뻗었다가 도로 내렸다. 시백은 가만히 그의 얼굴을 내려다볼 뿐이었다. 시백이 준혁을 처음 만난 후 4달하고도 며칠이 더 흘렀다. 시간이 갈수록 준혁은 자주 괴로워했고, 그만큼 더 약을 찾았다. 지금까지 버틴 것도 어쩌면 삶의 막바지에 그에게 찾아온 하나의 기적일지도 모른다. 시백은 준혁이 키우는 대형견이냐는 재호의 농담도 들을 정도로 준혁을 부지런히 따라다니며 그의 안위에 신경을 썼다. 그로 인해 시간이 더 주어진 것이라면 좋으련만, 촛불을 위태롭게 지키고 있다 한들 초 자체가 녹아내리는 걸 막을 방도는 없었다.
“걸으실 수 있겠어요?”
“…잠시만 있으면, 갈 수 있습니다….
시백이 준혁과 함께 보낸 4달은 그야말로 파란만장한 시기였다. 문득 그와의 첫 만남이 떠올랐다. 유상일을 쫓아 몰래 들어간 빈 임대 건물에서 처음 마주했던 그 날. 준혁이 쇠파이프를 들어 이경환을 내리치려던 순간에 시백은 앞뒤 가리지 않고 그에게 뛰어들었다. 병세가 위독했던 준혁은 시백의 기습에 그대로 중심을 잃고 바닥에 쓰러졌다. 생각보다 야윈 손목을 잡은 채로 내려다본 그의 표정은 시백이 살면서 보아온 표정 중에서 가장 처참한 것이었다. 무력감, 절망감, 죄책감. 세상의 모든 슬픈 감정은 그의 얼굴에 담겨있는 것만 같았다.
안색이 좋지 않은 준혁의 옆얼굴을 응시하며 시백은 머릿속이 복잡해지는 걸 느꼈다. 그 날 조금이라도 늦었다면 당신과 나의 현재는 지금과는 많이 달랐을까. 내가 당신이 선을 넘는 것을 막지 못했다면 어땠을까. 혹은 당신에게 일어난 슬픈 비극을 아예 알지 못했다면? 그를 막은 일에는 한 점의 후회도 없었다. 나는 그를 어떤 식으로든 도울 수 있었고, 준혁은 줄곧 마음에 씌워진 멍에를 천천히 풀어낼 수 있었다. 다행이라 생각했다. 그렇지 않았을 경우는 생각조차 하고 싶지 않았다. 이따금 벼랑에 내몰려 조급했던 준혁이 흔들릴 때마다 시백은 그를 굳게 붙잡았다. 여전히 그는 언제 스러질지 모르게 불안한 이였지만, 시백이 준혁의 아이인 수정을 지켜주리라는 믿음을 가진 이후로는 그나마 편안한 낯빛을 보였다.
그것만으로도 괜찮을 것이라고 시백은 몇 번이나 마음을 다잡았다. 하지만 미련을 아예 버릴 수는 없었다. 이런저런 가정과 물음들이 꼬리를 물고 이어지면, 더 나아가서 당신을 좀 더 일찍 만났더라면 어땠을까하는 생각까지 든다. 준혁이 일전에 말했던 ‘제멋대로 살았던’ 그 날에 자신이 그 곁을 지켜줄 수 있었다면 지금과는 다를 수도 있었을까. 그때 설령 준혁의 마음이 다른 사람을 향해 있다고 해도 말이다. 잠시 멍하니 생각에 잠겨있던 시백을 준혁의 목소리가 깨웠다. 자신의 손목에 얹어진 그의 손의 무게가 새삼 무겁게 느껴졌다.
“가죠, 시백 씨.”
“아, 네!”
자신의 품에서 조심스레 빠져나와 먼저 앞서가는 그의 뒤를 시백이 빠르게 쫓았다. 둘은 한동안 말없이 벚꽃잎이 드문드문 깔린 길을 걸었다. 준혁이 고개를 들어 풍경을 바라보는 동안, 시백은 그가 혹여나 상태가 다시 안 좋아질까 살피며 걷다가 결국 그의 얼굴만을 홀린 듯이 바라보게 됐다. 준혁은 벚꽃에 시선을 주다가 벚꽃 나무 사이로 작은 모형처럼 보이는 도시에 시선을 던졌다. 지금의 평화가 준혁에게는 어색했다. 오히려 벚꽃 사이에 이질적으로 존재하는 차갑고 무자비한 도시에 더 어울린다고 생각했다. 자신을 똑바로 향한 저 올곧은 마음 또한 자신과 어울리는 것은 아니었다.
“잠시 앉죠.”
멍하니 준혁을 바라보던 시백은 무슨 잘못이라도 들킨 것마냥 움찔 놀라곤 그가 앉은 벤치 위에 나란히 앉았다. 준혁은 그의 곱슬머리에 엉겨 붙은 벚꽃잎을 물끄러미 보다가 웃으며 손을 뻗었다. 긴 손가락이 머리칼에 와 닿을 때마다 시백은 자신의 얼굴이 벚꽃과 비슷한 색이 되지는 않았을까 몇 번이나 걱정했다. 준혁이 마지막으로 남은 벚꽃잎에 손가락을 뻗으며 담담한 목소리로 말했다.
“시백 씨와 처음 만난 날이 생각나네요.”
“어……. 네?”
“그 날부터 지금까지, 시백 씨는 제게 과분할 정도로 호의적이었죠.”
순수하게 생일을 축하해준 이에게 자신은 왜 모진 말을 하려 하는지. 준혁은 속으로 조소했다. 어차피 자신은 그에게 있어 상처로 남을 게 뻔했다. 준혁은 곧 시백의 곁을 떠날 사람이니까. 잠깐의 침묵 속에서 시백은 무어라 대답해야 할지 몰라 침만 꼴깍꼴깍 삼켰다. 고개를 들어 그의 표정을 보고 싶었지만 준혁은 허락하지 않겠다는 듯 그의 머리 위로 가만히 손을 얹었다. 목소리에서 느껴지는 담담함이 오히려 시백의 마음을 답답하게 옥죄었다.
“시백 씨는 알고 있겠죠. 당신이 날 막지 않았다면 나는 살인자가 되었을 거란 걸. …막았다고 해도 살인 미수였다는 건 변하지 않습니다. 경우에 따라 당신을 이용하려고 했을 수도 있습니다.”
“…선생님.”
“그런데도 절 믿는 이유가 뭡니까? 제게 그럴만한….”
가치가 있습니까. 목이 막혀와 말을 잇지 못했다. 가슴께에 묵직한 고통이 느껴지는 것 같았다. 병 때문이 아닌, 오래도록 느껴온 마음의 가책으로 인한 아픔이었다. 지연이 죽을 때 옆에 있어주지 못했다는 것과, 수정이에게 제대로 된 아빠 노릇도 못해준다는 죄책감. 미동도 없던 시백이 준혁의 손목을 단단하게 잡아왔다. 순간적으로 포커페이스가 흔들려 그에게 어떤 표정을 비쳤을지 스스로도 알 수 없었다.
“선생님이 조금 이해가 되지 않았던 적이 몇 번 있었어요. 선생님의 입장이 되어본 제가 물론 완전히 이해할 수는 없겠지만. 이유가 뭐냐고 물으셨죠?”
그 순간 시백의 눈빛을 본 준혁은 자신이 그에게 완전히 휘말렸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마주보는 이에게 벅찬 느낌을 줄 정도로 진중하고 흔들림 없이 자신을 바라보는 눈빛은 전율이 느껴질 정도였다.
“선생님을 믿고 싶었어요. 그리고 이제는… 믿고 있어요.”
“…….”
“그리고 선생님도 절 믿고 계시잖아요. 맞죠? 다른 이유는 없어요. 그뿐입니다.”
준혁은 어쩐지 맥이 풀리는 느낌이 들었다. 바보 같을 정도로 타인을 잘 믿는 사람. 그에게는 있고 자신에게는 없는 무언가. 자신을 사방으로 둘러싼 철창이 따스한 불길에 녹아내리는 것만 같은 감각이었다. 충동적으로 살인을 결심했던 그 순간과 지금은 매우 다르지만 한편으로는 같았다. 남은 시간이 얼마 없다는 것을 알았을 때 비로소 솔직해질 수 있는 것도 있다. 나는 간절히 원하는 것이 있다. 이제 외면하지 않고 그것을 쫓으려 한다. 내게 그럴 자격이 없을지도, 이기적인 선택일지도 모르지만, 그것이 나의 이기라고 생각해주지 않는 단 한 사람이 있다면….
“시백 씨.”
“어… 네, 네?”
시백은 방금 전까지 그렇게 확신에 차서 말해놓곤 자신이 괜한 말을 한 건 아닌가 걱정하는 기색이었다. 하여간 한결같은 사람이다. 준혁은 한결 홀가분해 보이는 미소를 지으며 시백의 손에 잡힌 손목을 움직여 손으로 시백의 손등 위를 감쌌다. 조금 차가웠던 준혁의 손은 시백의 온기에 동화되었다.
“고맙습니다. 시백 씨가 있어서… 다행입니다.”
최재석 관장님이 부럽군요. 내가 떠난 이후로도 당신과 오래 함께 있을 수 있다니 말입니다. 준혁이 여전히 입가에 미소를 걸친 채 느리게 눈을 감고 온기를 느끼는 동안 시백은 지금이 고백하기에 적절한 타이밍인지 속으로 헤아리고 있었다. 나쁘지 않은 타이밍인 것 같은데, 정작 그에게 다정한 말을 들으니 머리가 제대로 돌아가지 않았다. 시백은 멋쩍은 듯 남은 손으로 연신 뒷목을 어루만졌다.
“저는… 끝까지 선생님의 옆에 있고 싶습니다. 묻고 싶은 것도, 알고 싶은 것도 너무 많아요. 그러니까 혼자 있으려 하지 마세요. …저와 처음 만날 그 날처럼.”
작은 웃음소리가 들렸다. ‘좋아해요’라고 이으려던 말이 목구멍 안으로 쏙 들어가 버렸다. 그러고 보니 선생님이 이렇게 환하게 웃는 모습은 본 적이 없다고 시백은 생각했다. 그런 생각을 하니 머리나 몸이 마비되어버린 듯 움직이질 않았다. 방금 모습을 영상으로 남겨서 두고 두고 볼 수 있다면 좋을 텐데. 시백은 홀로 한여름에 있기라도 한 듯 느껴지는 더위에 자꾸만 헛기침을 했다. 결국 타이밍을 놓쳐버린 시백에게 바통을 이어받은 듯 준혁이 입을 열었다.
“이렇게 꽃구경 온 것도 오랜만입니다. 어쩌다 본다고 해도 지나가는 길에 잠깐 봤을 뿐이었고… 이젠 뭘 할까요? 시백 씨.”
시백은 뒤늦게 정신을 차린 듯 눈을 부릅 떴다. 그의 인상과 어우러져 제 3자가 보면 조금 무서워 보일 수도 있을만한 모습이었지만 적어도 준혁에게는 아니었다. 흡, 하고 짧게 숨을 들이쉰 시백이 준혁의 손을 잡은 채로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당연히! 생일 파티 해야죠! 사실 그게 메인이거든요. 어, 빵집 문 닫기 전에 케이크 사야 하는데. 선생님, 혹시 케이크 싫어하세요?”
“싫어하진 않습니다.”
“좀 뻔하긴 하지만 초 끄면서 소원 빌기나 하죠. 어때요?”
준혁이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일어나자 시백이 손을 더 굳게 맞잡고 앞으로 이끌었다. 준혁은 고운 벚꽃을 배경으로 제게만 짓는 미소를 마지막 순간에 기억해내리라 마음속으로 다짐했다. 시백은 어느새 도시를 붉게 물들이는 황혼을 보며 제 손에 미약하게 남은 온기를 소중하게 감쌌다.
만난 지 오래 되지도 않은 것 같은데, 선생님의 시간은 계속 사라져간다.
그러나 마지막 순간까지 자신이 곁에 함께 해줄 수 있다면, 그때는 정말 웃으며 그를 보낼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설령 선생님이 떠나실 때 견디기 힘든 아픔을 느낀다고 해도.
'회색도시 (City of Mist)' 카테고리의 다른 글
[시백준혁] 어느 봄의 기억들 上 (0) | 2018.04.05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