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빠른 시간 내에 쓴 글이라 퇴고를 안 한 글이 많습니다.
1. 콧수염
* 2회 전력.
* 커플링: 셜존
존은 이 무거운 침묵과 그 안에서 유독 강하게 느껴지는 시선에 불편함을 감추지 못했다. 애써 무시하려고 시선을 다른 곳에 던져도, 자신의 얼굴에서 무언가의 징조를 찾아내려는 것처럼 자신의 눈높이보다 조금 높은 곳에서부터 끈질기게 쏟아져내리는 눈길이 자신의 얼굴을 간지럽히는 것 같았다. 이런 반응을 예상하지 못한 것도 아니었지만. 이런 때만큼은 예상이 좀 빗나가줬으면 하는 바람이 조금 있었던 것도 사실이었다.
흠흠. 불편한 기분이 묻어나오는 헛기침 소리와 함께 존은 한참 후에야 셜록을 바라보았다. 그러자 자신의 얼굴 어느 한 부분에 집중되어있던 셜록의 눈동자가 흠칫 움직이며 존의 눈동자에 맞춰졌다. 그래. 결국은 이게 신경 쓰인단 말이지. 조금 단호해보이는 눈빛을 쏘아보낸 후 존은 어색한 공기를 무마하고자 테이블 위에 있는 게 무엇인지 인식하기도 전에 무심결에 집어들었다.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타두었던, 아직 따끈한 김이 몽글몽글 피어오르는 차가 담긴 잔이었다. 생각없이 급하게 마신 뜨거운 차 한 모금은 혀의 돌기가 확 곤두서는 느낌을 받기에 충분했다. 젠장. 존은 입맛을 다시며 얼얼한 혀로 입 안을 쓸었다. 언제까지 이렇게 있을 수는 없다.
"그렇게 보지만 말고, 차라리 대놓고 뭐라고 하지 그러나? 자네 그런 거 잘하잖아."
"오."
딱 봐도 영혼 없어보이는 리액션에 존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무슨 말을 하든 불만스러워 할 거란 건 이미 예상했던 일이었다. 이미 '전례'가 있었으니까 말이다. 그 때는 지금과 달리 아주 면전에 대고 신랄하게 말했다는 점이 다르지만 말이다. 어쩌면 갑작스러운 존의 행동에 의중을 파악하기 위해 속으로 온갖 추리를 다 하고 있느라 말 한 마디 꺼내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묻었어. 차."
"아."
갑작스레 들린 지적에 헛기침이 나올 뻔 했다. 뭔가 허를 찔린 기분이라 존은 허겁지겁 냅킨을 가져와 입 위를 닦아냈다. 셜록은 여전히 그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었다.
"아무튼, 지금 내 콧수염에 불만 있는 거잖아. 맞지?"
"오. 불만이라기 보다는, 의문을 가지고 있는 거라고 하는 게 맞겠지."
"그럼 자네가 예전에 보여준 건 불만이 아니었다고?"
그제야 셜록의 미간이 살짝 찌푸려졌다. 그래, 그러시겠지. 그 땐 그렇게도 불만을 가졌던 것에 대한 생각이 벌써 바뀌었을리는 없다.
"그건 사실을 말한 것 뿐이야. 코 밑에 요상한 걸 달고 다녔을 때 자네는 훨씬 나이 들어보였으니까."
"자네가 나타나서 그렇게 예의없이 말하기 전에는 잘만 하고 다녔어. 아무도 뭐라 하지 않았다고."
"호, 그런가? 메리의 반응은 까맣게 잊어버린 모양이군."
"그건."
"그리고, 그 때 다른 사람들이 자네를 만났을 때 우선 콧수염에 시선이 가지 않았나? 내 예상에, 열에 아홉은 콧수염에 반응했겠지. 물론 자네 앞에서는 아무 말 안 했겠지만, 그 때 속으로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을 것 같나? 표정에서 어느 정도 짐작할 수 있으리라 생각하는..."
"됐어. 시끄러워."
역시 언쟁이 길어지면 존이 조금 불리했다. 존은 약간 짜증스러운 어조로 짧게 대꾸하곤 다소 과장된 몸짓으로 차를 한 모금 더 마셨다. 이번에도 콧수염 부근에 묻어나온 액체가 셜록의 시야에 들어왔지만, 그저 짜증스러운 눈빛으로 바라볼 뿐 아까와는 달리 그에 반응하지는 않았다. 대신 드디어 그의 불만의 본질을 입 밖에 꺼냈다.
"그래서, 콧수염은 왜 갑자기 다시 기르는 건데?"
"그거 추리하려고 아까까지 아무 말 안 하고 내 얼굴만 뚫어지게 본 거 아니었나? 자네가 그랬잖아. 내 머리부터 발 끝까지 나오는 모든 정보로 나의 모든 걸 알 수 있다고."
셜록이 갑자기 입을 다물었다. 예상치 못한 반응에 존도 표정을 바꾼채 셜록을 재차 올려다보았다. 예상대로라면 존이 미처 깨닫지 못했던 자잘한 부분들까지 줄줄 언급해가면서 자신의 추리를 자랑하듯이 한동안 읊을 것이 뻔했는데 말이다. 설마 이건 모르는 건가? 어색한 시간이 무겁게 흐르고, 셜록은 생각보다 확신 없어보이는 목소리로 느리게 말했다.
"...내가 일주일간 자리를 비워서?"
"뭐? ...푸."
정말 예상도 못한 대답에 입에서 헛웃음이 나와버렸다. 진심으로 하는 소린가? 농담치고는 그의 표정이 너무 진지했다. 철저하게 증거들과 자신의 이성만을 기반으로 한 추리라기엔 너무나 인간적인 대답이었다. 아까의 패배감은 이미 사라지고 신기한 기분이 들었다. 저런 면도 있구나.
"아, 그러니까... 하하. 물론 타이밍이 엄청 묘하긴 했지. 콧수염을 자네와 일주일 간 만나지 못하는 사이에 조금씩 기르고 있었으니까. 그렇다고 설마 그런 이유라고 생각했을 줄이야."
자신이 나름대로 꺼낸 추리가 완전히 빗나갔다는 걸 깨달은 순간부터 셜록은 불편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지나치게 놀리는 건 좋지 않겠지만, 존이 셜록의 이런 표정을 볼 수 있을 상황이 과연 얼마나 있을까? 어쩐지 지금 이 순간을 누리고 싶어져서인지 자꾸만 입가에 걸리는 미소를 참기가 힘들었다.
"그래도 간혹 추리에 사용될 수도 있어서 관습 같은 건 다 꿰고 있었을 줄 알았는데, 꼭 그런 것도 아니었나봐?"
존은 Movember-남자들이 한 달간 콧수염을 기른 후 주변 지인과 자신이 모은 소정의 금액을 전립선 암 환자들을 위해 단체에 기부하는 캠페인으로, Moustache와 November가 합쳐진 말-라는 캠페인에 대해 설명해주었다. 의사로서 그 캠페인에 참여하게 되었고, 1달동안은 싫어도 콧수염을 볼 수 밖에 없을 것이라는 얘기였다. 설명을 다 들은 이후의 셜록의 표정은 여전히 불편함이 여실히 드러나있었다.
"아니 근데, 왜 이유가 그거라고 생각한 거야? 진짜 궁금해서 그런데. 그렇게 추리한 이유가 있을 거 아니야."
"...내가 런던을 비운 동안의 가장 큰 변화가 그거였으니까. 그리고 내가 돌아온 후에 얼마 안 있어 사라지기도 했고. 물론 그건 내가 콧수염에 대해 안 좋은 소리를 해서도 있었지만."
존은 잠시 말없이 셜록을 바라보았다. 그 2년동안, 자신에게서 변한 건 콧수염 뿐이 없다고 생각한 것일까? 손가락이 가만히 콧수염을 더듬자 아까 묻었던 차가 차갑게 손 끝을 적셨다. 꽤나 오랜만에 기른 콧수염에 아직 적응이 되지 않은 것이리라.
처음에도 그랬다. 존은 원래 콧수염을 기를 생각이 없었다. 셜록의 장례식 이후 한동안 외톨이처럼 플랫에 틀어박혀 지내면서 자신의 외모를 꾸미는 데에도 신경 쓸 여지가 없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그런 걸 신경 쓸 수 있을만한 정신력이 남아있지 않았다고 해야하나. 시일이 좀 지난 후 문득 본 거울 속의 자신의 모습은 수염이 정돈되지 않은채로 얼굴을 지저분하게, 덥수룩하게 덮고 있는 모습이었다. 그 때서야 실감이 났다. 셜록이 있을 때의 자신과 셜록이 없는 지금의 자신은 정말 다른 사람이라는 걸. 하지만 떠나고 없는 이의 빈 자리만을 좇을 수는 없다는 것을. 세면대에서는 자조적인 웃음소리가 흘러나왔다.
그 때부터였다. 존이 콧수염을 기르기 시작한 것은. 사실 존도 콧수염을 기른 것 자체가 그렇게 편하지만은 않았었다. 생전 해본 적이 없는 일인지라 처음에는 다듬는 데에 다소 애를 먹기도 했고, 지금처럼 자신이 먹은 음식물을 콧수염에 표시해두고 다니기도 했다. 까칠하게 자신의 인중을 덮는 그 감촉도 참아가며 콧수염을 길렀던 건, 그래야 그나마 거울 속에서 셜록과 함께 있는 자신을 보지 않을 수 있어서였다. 예전과 달리 콧수염이 코밑에 단정하게 자리잡은 지금의 자신의 모습을 볼 때는 그나마 셜록을 떠올리지 않을 수 있었다. 셜록이 자신의 곁에 있었다면 콧수염에 대해 한 마디 했을테지만, 그는 이제 자신의 옆에 없었다.
그런 복잡한 심정을 셜록이 알까? 아니, 몰랐을테고 앞으로도 모를 것이다. 그래서 셜록이 돌아오고 나서는, 셜록의 무례한 태도에도 불구하고 다소 가벼운 마음으로 자신의 모습에서 콧수염을 지워내고 예전 모습처럼 돌아올 수 있었다는 것도. ...절대로 알 수 없을 것이다.
존은 미묘한 웃음을 짓곤 남은 차를 마셨다. 처음 콧수염을 기르던 그 날처럼 차는 또다시 존의 콧수염에 묻어났다. 하지만 그 날과는 확연히 다르다는 것을 알았기에 존은 오늘은 웃을 수 있었다.
2. 느와르
* 3회 전력.
* 논커플링. 셜록, 아이린이 나옵니다.
검은 코트 끝자락이 사락, 하는 소리를 끝으로 멈추었다. 깊은 생각이 서린 입김이 순간적으로 뿌옇게 시야를 가리운다. 묘묘한 빛을 띈 눈동자가 빠르게 앞에 버티고 선 공간을 구석구석 빠르게 훑었다. 코트를 입었음에도 살갗을 날카롭게 베어갈 것만 같은 시린 겨울 바람 속에서, 그 공간은 어느 공간보다도 차갑고 죽은 것 같은 느낌을 주었다. 칠흑같은 어둠 속에는, 지구상에서 가장 무섭고도 잔혹한 생물일 인간의 손이 타지 않는 틈을 타 슬그머니 영역을 넓힌 거미들이 지은 보금자리만이 희끄무레하게 비치는 햇빛을 받아 음울한 은빛으로 빛을 낼 뿐이었다. 낯선 존재의 방문에 그가 한 걸음을 딛을 때마다 구석구석에서 쥐들이 부산스레 바닥을 스치는 소리가 여기저기서 들려왔다.
-분명 여기일텐데. 잘못 알았을리는 없다. 확실한 정보와 추론에 입각한 것이었는데. 정적에서 느껴지는 불길함에 셜록은 은밀히 허리춤에 손을 얹었다. '이 세계'는 언제라도 발을 딛고 서있는 이곳이 자신의 무덤이 될 수 있는 곳이었다. 자신의 손으로 죽인 시체를 밟고 올라가야 죽음의 늪에 빠지지 않을 수 있는 세계. 마피아들의 세상이란 그런 것이었다. 쭉 무덤처럼 조용한 이곳도 지난 세월동안 몇 명의 유골을 품었을지 알 수 없는 일이다. 방심하면, 죽는다. 마음을 놓는 순간이 제게 겨누어진 권총의 방아쇠를 놓는 것이 될수도 있었다.
조금 더 안쪽으로 들어가자 여태 걸어왔던 것보다는 조금 더 밝고 넓은 공터가 나타났다. 그렇지만 이런 비밀스러운 일이 늘 그렇듯이, 이 공터도 어둠 속에 제 모습을 거의 숨기고 있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무언가 달랐다. 이곳에 발을 들인 순간부터 셜록 또한 이를 알아챘다. 드문드문 드리워진 어둠 속에서 사람의 형상이 흔들렸다. 어둠을 헤치며 나타난 사람은 셜록의 예상보다는 조금 더 굴곡진 체형을 지니고 있었다. ...여자?
"어서 와요."
셜록의 눈이 빠르게 여자를 훑었다. 가면처럼 두껍게 얼굴을 감싼 짙은 메이크업과, 체취마저 가려버리는 강한 향수 냄새, 그리고 현재 자신들이 처한 상황과 분위기와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관능미를 뽐내는 옷. 한 발 한 발 그녀가 셜록에게 다가올 때마다 두껍게 깔린 먼지 위를 날카로운 하이힐이 찍어눌렀다. 그녀가 꽤나 거리를 좁혀올 때까지도 셜록의 머릿속은 그녀가 누구인지에 대한 생각으로 복잡하게 얽혀갔다.
"허를 찔린 것 같아보이는 그 표정, 볼만한데요."
"...당신이 거래 상대인가."
"그래요. 셜록 홈즈 씨. ...흐음, 언제까지 그렇게 구경만 하는 것처럼 서있을 거죠?"
"물건은?"
여자는 여유롭게 자신의 발치로 눈길을 주었다. 그곳에는 까만 서류 가방이 다소 무방비하게 놓여있었다. 셜록 또한 자신의 한 손에 쥐고 있던 가방을 그녀의 눈앞에 보였다. 가방의 존재를 확인한 그녀의 눈썹이 가볍게 까딱였다.
"내용물을 좀 확인해봐야겠네요."
"물건 쪽을 먼저 보여줘야하는 거 아닌가? 이쪽은 클라이언트인데."
"알잖아요? 이쪽 세계, 대가 없는 물건을 바라는 얌체 같은 자들 많은 거."
"...좋아. 먼저 보여주지."
이건 기회다. 셜록이 가방으로 몸을 굽혔다. 그리고 찰나의 순간, 미리 몸속에 숨겨두고 있던 권총으로 빠르게 손을 뻗어 꺼냈다. 총구가 그녀의 머리를 겨누는 데에는 10초의 시간도 걸리지 않았다. 그러나 다음 순간-
찰칵. 자신의 턱 아래로 날카롭게 들리는 장전음에 셜록은 미간을 찌푸렸다. 총구가 이마에 대어진채로 눈앞의 여자가 살짝 미소지었다. 셜록이 여자의 이마에 총구를 가져간 것과 거의 동시에, 그녀 또한 검은 총구를 심장을 당장이라도 뚫어버릴듯이 셜록의 가슴께에 겨누고 있었다. 으스스한 침묵이 둘 사이에 낮게 깔렸다.
"훗. 숫처녀마냥 둔감해보이면서, 금새 숨기고 있던 발톱을 드러내네요. 그래, 이 편이 더 재미있지."
"그쪽도 좋을 게 없을 상황일텐데."
"날 이대로 죽여서 셜록 홈즈 씨가 손에 넣는 것? 뭐, 원래 거래 물품이었던 이 물건을 가져갈 수야 있겠죠. 하지만 난 말이죠..."
가슴에 대어져있던 총구가 천천히 올라가 셜록의 턱밑에 겨누어졌다. 고혹적이면서도 차가운 눈빛에 웃음기가 서렸다.
"난 지금 당장 방아쇠를 당겨 작은 금속이 당신 머리를 관통해버려도 상관없는데."
"......"
"어머. 이 광대뼈 좀 봐. 때리면 손이 베어버릴 것 같은걸. 한 번 살려달라고 빌어볼래요? 그 모습을 찬찬히 구경해주다가, 삶이 끝나는 마지막 순간에 희망을 앗아가듯 당신 뺨을 때려버리는 것도 재밌을 것 같은데. "
"...아이린 애들러."
짙고 곧게 그려진 눈썹이 살짝 꿈틀거렸다. 하지만 찰나에 보이던 동요도 잠시, 아이린 애들러는 다시 본연의 냉혹한 킬러의 모습으로 돌아왔다.
"역시 만만한 사람은 아니네요. 셜록 홈즈... 그래서 재밌어. 난 내 타겟이 시시하게 죽는 거, 재미 없거든요."
"이건 게임이야. 아이린 애들러."
셜록의 굳은 얼굴에서도 다시 슬며시 미소가 떠올랐다. 그녀의 이마에 대어져있던 총구를 더 힘주어 눌렀다. 이 머릿속에 있는 걸 입 밖에 내게 하리라. 가면과도 같은 그녀의 존재 뒤에 숨은 자에 대한 정보를 얻을 것이다. 그 때까지는 그녀를 죽일 수 없다.
"...그거 좋네요."
3. 런던
* 4회 전력.
* 논커플링. 203 이전 시점.
발걸음마다 먼지가 나풀나풀 춤추는 계단 끝에 다다르자 철문 하나가 눈앞에 버티고 섰다. 여타 다른 철문들과 비슷한, 오히려 일반적인 것보다 낡아보이는 철문이건만 지금 이 순간만큼은 드높은 철옹성의 문 같은 느낌을 주었다. 이 철문을 열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이미 수많은 시나리오와 경우의 수를 머릿속으로 떠올려본 셜록이지만, 이 철문 너머에 있는 상대가 상대인지라 방심할수는 없었다. 창백한 손이 문 손잡이를 잡고 천천히 돌리자, 거슬리는 소리를 내며 철문이 열어젖혀졌다.
그리고 바로 눈 앞에, 그가 있었다.
'짐 모리아티'로서 처음으로 셜록과 마주했던 그 날처럼 군더더기 하나 없이 깨끗한 까만 양복에 감싸인채로 서있는 그 뒷모습. 분명 기척을 느꼈을텐데도 모리아티에게서는 별다른 반응이 없었다. 마치 세상을 자기 발 아래에 두고 멋대로 지휘하는 것처럼, 번지르르한 까만 구두는 여전히 박자를 맞추고 있었고 고개는 리듬에 따라 유려하게 흔들렸다. 드문드문 구름 사이를 비집고 나오는 햇빛이 스포트라이트처럼 그의 몸 위를 비추다 사라지곤 했다. 때마침 절정에 이르렀던 몸짓은 이제 마지막에 접어들고, 셜록이 다가가는 걸음에 따라 천천히 느려졌다. 그리고-
"God, save the queen(신이여 여왕을 구하소서)!"
탄성인지 탄식인지 모를 한마디를 끝으로 그제야 모리아티가 몸을 돌렸다. 생각을 알 수 없는 서로의 눈빛이 허공에서 맞부딪혔다. 깊은 어둠을 띈 눈에서 순간적으로 광기가 엿보이다가, 흔적도 없이 꺼져버렸다.
"셜록 홈즈."
알파벳 하나 하나를 씹어내듯 뱉어내는 소리는 셜록의 이름이 되어 귓속을 두드렸다. 셜록은 여전히 무심한 듯 보이지만 온갖 생각이 뒤섞인 눈으로 그의 일거수일투족을 쫓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며 모리아티는 빙긋 웃고는 옥상 난간에 털썩 걸터앉았다. 등 뒤로는 런던 시내의 고층 건물들이 숨막힐 정도로 반듯하게 늘어서있었다.
"일대일 만남으론 괜찮은 장소지? 첫 대면의 장소. 바츠 병원. 수수께끼 잘 풀고, 잘 찾아와줬어."
"그래서, 날 여기로 부른 이유는?"
모리아티가 대뜸 인상을 구기며 이마를 짚었다. 반응이 영 마음에 안 드는 눈치였다. 이런 이런. 가벼운 탄식을 흘리며 모리아티는 웃었다.
"오, 뭘 벌써부터 굳어있고 그래? 으응, 오늘은 아니야. 그래, 일종의 프롤로그라고나 할까? 이야기에는 기승전결이 있어야 하니까."
새하얀 목이 쭉 뻗더니, 그는 어깨 너머로 까마득하게 멀어보이는 길거리와 건물들을 훑어보았다. 금방이라도 떨어질 것처럼 불안정해보이는 모습이었지만, 모리아티는 이를 오히려 즐기는지 일면 짜릿한 웃음을 지어보였다.
"여기가 그 시작점이지. 바츠 병원, 런던. 재밌겠지? ...근데 말이야."
연신 웃음기를 감추지 않던 모리아티가 갑자기 낮은 목소리로 물어왔다. 왜 런던에 있는 거야? 단순히 네가 태어난 곳이라서? 혈육 때문에? 그것도 아니면, 길들이면서 동시에 길들여져버린 충견 때문? 셜록은 자신도 모르게 눈살을 찌푸렸다. 의미없는 문답이나 하자고 이곳에 온 게 아니다. 셜록이 입을 굳게 다물었지만, 눈앞의 이야기꾼은 개의치 않고 쉼없이 말을 조잘거렸다.
"'신이여, 여왕을 구하소서'라니, 참 웃기는 말이야. 안 그래-?"
여왕의 나라라고 불리는 영국. 그리고, 그 심장부인 런던. 런던은 기묘한 도시였다. 신사의 나라라 불리는 영국답게 점잖아 보이는 도시의 이면은 폭력과 범죄로 물들어있었다. 평화로운 도시의 어딘가에서는 매일 같이 낮에는 평범해보이던 사람들 중 누군가는 손에 피를 묻히기도, 누군가는 자신의 피로 런던 바닥을 물들였다. 그들에게는 신도, 여왕도 없었다. 그들은 그저 생존을 위해 치열하게 몸부림치는 도심의 정글에 들끓는 맹수 같은 존재들일 뿐. 이를 쫓는 셜록이나, 그 맹수들 위에 군림한 모리아티나 그들과 별반 다르지 않으리라. 남들에게는 보이지 않는 런던의 모습이 그들에게는 여실히 보였으니까.
"여기서 보니까, 참 장난감 같아 보이지? 모든 게."
셜록도 그제야 자그마한 런던의 거리와 사람들에 시선을 주었다. 나에게, 런던이란 그런 거야. 모리아티가 아침 식사 메뉴라도 얘기하는 것 같은 가벼운 톤으로 말했다. 신에게 여왕을 지켜달라는 기원이 나오기도 전에, 내 손으로 산산이 무너뜨릴 수 있는 장난감. 하얀 손바닥이 눈 앞에 펼쳐지더니 모리아티는 입김을 후 불어 날려버리는 시늉을 했다. 펼쳐진 손 위로 런던의 풍경이 유독 선명하게 보이는 것 같았다.
"자신만만하군 그래. 그런 네가 지금까지 정체를 숨기며 조용히 지냈다는 게 놀라운데."
"오, 그동안은 나를 즐겁게 해줄 상대가 나오지 않았으니까."
"......"
"그리고, 재밌는 장난감은 그렇게 간단히 부수고 싶지 않거든. 질릴 때 쯤 되면 나에게 환희를 주던 아름답던 그 모습 그대로, 안에서부터 천천히 내 손으로 부수는 게 재밌지 않겠어? 이제 등장인물은 준비되었으니, 그리 오래 기다리지 않아도 되겠지."
"...곧 판을 만들고, 종국에는 부숴버릴 생각인가."
"호오. 글쎄-? 이야기의 무대로는 손색 없다고 생각하긴 해."
입꼬리를 올리며 히죽 웃곤 모리아티는 앉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꼿꼿하게 선 그의 등뒤로 런던의 풍경이 배경처럼 펼쳐져 있었다. 모리아티에게는 그가 서있는 곳이 곧 왕궁이며, 세상의 중심이었다. 곧 자신의 손 아래에 요동칠 런던을 생각하니, 웃음이 나오지 않을 수 있겠는가?
이야기는 이제 곧 시작이야. 조만간 보자고, 셜록 홈즈. 긴 여운을 남기는 인사와 함께 모리아티가 셜록을 천천히 스쳐지나갔다. 여유로이 가는 그를 셜록도 잡지 않았다. 이제 게임은 시작되었다. 그가 생각하고 있는 판을 엎는 것은 자신이 되리라. 앞으로 있을 일을 그리는 셜록의 머리에 다시 한 번 이야기의 무대인 런던의 넓은 지도가 펼쳐졌다.
4. Pet
* 5회 전력.
* 커플링: 셜존
표정을 잔뜩 구긴 채 '불만 있음'을 온몸으로 표현하는 셜록의 표정은, 평소 사건이 없어서 지루함을 표현할 때의 셜록의 그것과 비슷하면서도 달랐다. 사건이 없기도 했지만, 오늘은 조금 다른 이유에서였다. 눈을 감고 다른 생각을 하려 애쓰던 셜록의 시선은 자꾸만 다른 곳으로 향하고 있었다. 시선의 끝에는 평소와는 다른 다소 생소한 풍경이 보이고 있었다.
"옳지. 착하지."
아이를 어르듯 다정한 존의 말투는 자신을 향한 것이 아니었다. 존의 무릎맡에는 자그마한 무언가가 꼼틀거리며 기쁜 듯한 울음 소리를 내고 있었다. 작은 털뭉치처럼 보는 것만으로도 보드라운 느낌이 들 것 같은 포메라니안 종이었다. 존의 쓰다듬을 받은 강아지는 연신 꼬리를 흔들며 한껏 재롱을 떨고 있었다. 셜록이 아침에 깨어난 이후 지금까지 줄곧 보고있는 장면이었다.
사정은 이랬다. 아침에 존이 잠시 식료품을 사러 나갔을 때, 갑작스레 강아지를 하루만 돌보아줄 수 없겠냐는 이웃의 부탁을 받게된 것이었다. 일이 생겨 하루동안 집을 비워야 하는데 강아지가 너무 어려 집에 혼자 두고 갈 수 없을 것 같다는 것이었다. 마침 딱히 사건이 없던 터라 존은 그 부탁을 받아들인 것이었고, 그렇게 해서 식료품 한 바구니와 더불어 존의 품에 안긴 강아지 한 마리가 플랫에 들어오게 된 것이었다. 밖에서 돌아온 존의 모습을 본 순간 들었던 복잡한 기분이 되살아나자 셜록은 애써 머릿속을 비우려 안 그래도 찌푸려져 있던 미간을 더 좁혔다.
"음... 셜록? 뭐 하나만 물어봐도 될까?"
"뭐지?"
"...혹시 강아지 싫어해? 아니면 뭐, 강아지가 아니라도 애완동물은 별로라던가."
"글쎄."
다소 무뚝뚝한 대답이 돌아오자 존은 괜시리 민망한 듯 손을 뻗어 재차 강아지의 등을 쓰다듬었다. 하긴, 딱히 관심이 없을 것 같다고 생각하기는 했었다. 어쩌면 흥미로운 범죄자 이외의 생물은 다 싫어하는 거 아닐까 싶은 생각까지 들 정도였으니까. 눈과 입을 닫고 있는 셜록의 속마음을 존이 알 리 없었다.
-싫어하는 게 아니야.
셜록의 마음 속에서 작은 울림이 들려왔다. 어느샌가 잠시 잊고 있던, 마인드 팰리스 깊숙한 곳에 감추어져 있던 무언가가 그의 뇌리를 스쳐갔다. 레드비어드, 레드비어드. 멀리 들리는 목소리는 어릴 적 자신의 목소리였다. 손에 감겨들어왔던 부드러운 붉은 털의 감촉과 자신의 볼을 할짝이던 따뜻한 혀의 감촉도 그 때로 돌아간 것 마냥 선명했다.
오래도록 정을 주었던 게 실감나지 않을 정도로 레드비어드는 순식간에 그를 떠나버렸다. 레드비어드가 세상을 떠난 후 셜록에게 남은 것은 레드비어드의 털 몇 가닥이 묻은 옷가지 뿐이었다. 그 때, 셜록은 정을 준 대상과의 이별이 주는 아픔이란 게 무언지 알아버렸다.
셜록의 눈길이 저도 모르게 강아지의 점심 식사를 챙기러 가는 존의 뒷모습으로 향했다. 레드비어드에 대한 아픈 기억과 함께 마음 속에 가둬둔 자신의 마음. 마음의 궁전 안에 있는 비밀의 방. 그 아픔을 다시 경험하고 싶지 않다. 하지만, 셜록 또한 느끼고 있었다. 어느샌가부터 그 문이 서서히 열리고 있다는 걸.
그 때, 문득 발치에 움직임이 느껴졌다. 하얀 포메라니안이 어느샌가 그의 발치에 다가와 까만 눈동자에 셜록의 모습을 담고 있었다. 그 까만 눈동자가 어린 시절 언젠가 보았던 그 눈망울과 닮아보여 가슴 한 쪽이 아프게 저렸다. 셜록은 가만히 손을 뻗어 강아지의 머리에 손을 얹었다. 레드비어드에게 그랬던 것처럼, 가볍게 두어번의 쓰다듬.
"너도 언젠가는 떠나겠지."
누구에게로 향한 것인지 모를 말이 허공을 맴돌았다. 그 말의 의미를 아는 건지 강아지는 가만히 그 슬픈 손길을 받고만 있을 뿐이었다.
5. 학교
* 6회 전력.
* 해리포터 AU. 원작 인물의 이름이 딱 한 번 나옵니다만 스토리에 큰 영향은 없습니다. 문제의 소지가 있으면 말해주세요.
* 논커플링. 호그와트에 입학한 셜록과 존의 첫만남 이야기.
누구나 삶의 전환점이란 건 경험하기에 마련이다. 아주 어린 나이부터 인생의 끝이라는 목표 지점까지 걸어가는 인간들은, 도중에 몇 번이고 터닝포인트를 맞게 된다. 갈림길을 만나서 선택을 강요받게 되기도, 울퉁불퉁한 자갈길과 험한 오르막길 같은 길에서 스스로 지쳐나가떨어지기도 한다. 어느 인간이든, 그들 앞에 길은 놓여있다.
셜록 또한 마찬가지였다. 그는 또래 다른 아이들과는 조금 다른 점이 많은 아이였지만, 그에게도 그런 시기는 어김없이 찾아왔다. 바로 지금, 셜록은 자신의 삶을 상당 부분 바꿔놓게되는 계기가 될 편지 봉투 한 장을 손에 들고 있었다. 예전에도 본 적이 있는 인장이 편지 봉투 한가운데에 자리 잡혀있었기에 셜록에게 그 편지가 어떤 내용일지 추리하는 건 어렵지 않았다.
편지 봉투를 들고 터덜터덜 부엌으로 걸어가자, 마찬가지로 이 편지의 정체를 알아본 셜록의 부모님이 화색을 띄우고 셜록에게 다가와 곱슬한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어주었다. 자랑스러워하는 마음과 부모의 애정이 듬뿍 담긴 것이었지만 셜록의 표정은 밝아지지 않았다.
당신에게.
호그와트 마법학교에 입학이 허가되었음을 알리게 되어 기쁩니다.
동봉한 도서 및 지참물 목록을 확인바랍니다.
학기는 9월 1일에 시작됩니다. 부엉이를 통해 전하는 회신을 7월31일까지 보내 주기 바랍니다.
그럼 안녕히 계십시오.
Minerva McGonagall
Headmistress
다시 문구를 눈으로 훑는 셜록의 표정은 한층 더 구겨졌다. 그는 이 모든 상황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입도 거의 대지 않은 밥그릇을 뒤에 남겨두고, 이 불만의 원인인 편지 또한 없는 물건 취급하듯 그 옆에 남겨둔채 셜록은 자리를 박차고 나왔다. 불만이 실려 더더욱 크게 들리는 발소리를 내며 계단을 올라간 셜록은 지금 이 순간 가장 마주치고 싶지 않았던 얼굴을 마주해버렸다.
"비켜, 마이크로프트."
작은 짐승이 으르렁거리는 것 같은 목소리에도 셜록의 형, 마이크로프트는 눈 하나 깜빡하지 않았다. 으레 그런 반응을 보아왔다는 것처럼. 아무 감정도 담겨있지 않은 것 같지만 바라보는 이를 억누르는 무언가가 실린 침착한 눈빛이 셜록의 눈을 마주했다. 하지만 그 뿐, 마이크로프트는 그 자리에서 꼼짝도 하지 않았다. 그건 보이지 않는 형제의 자존심 싸움이었다.
"아침부터 화가 나있구나. 셜록."
"...비켜."
"어딘가에 '소속'되어야 한다는 사실이 네게는 불편한가 보구나."
마이크로프트의 손에는 이미 자신이 받았던 것과 같은 편지가 들려있었다. 마이크로프트는 셜록에게 있어서 앞을 가로막는 큰 벽과 같은 느낌을 주었다. 셜록은 몇 년 전, 마이크로프트가 자신이 그랬던 것처럼 이 편지 봉투를 받은 후 '호그와트'라는 학교에 들어간 것을 기억했다. 부모님의 손에 이끌려 따라갔던 기차 플랫폼. 뿌연 연기 속에서도 마이크로프트가 망토를 휘날리며 당당하게 걸어간 뒷모습이 분명하게 눈에 박혔다. 그는 부모님의 자랑스러운 맏아들이었으며, 양친의 기대대로 호그와트에서 차근히 그의 입지를 넓혀가고 있었다.
성적도 우수하고, 리더쉽도 갖추고 있는 그는 이변이 없는 한 올해 레번클로의 반장이 될 터. 그런 마이크로프트는 셜록에게는 항상 큰 벽과 같이 느껴졌다. 드높은 벽 너머의 그를 동경하면서도, 셜록은 그 벽을 넘어갈 수 없었다.
"그래. 학교? 그런 거 난 필요없어. 난 지금 생활에 만족해. 다른 사람에 의해 강제로 평가받고, 어딘가에 들어가야 한다는 게 짜증나. 더 많은 바보들이 있는 곳으로 가는 것 뿐이라고."
"그래. 호그와트에 가서 기숙사를 배정받고, 네 행실과 성적을 평가하는 것은 모두 네가 아닌 다른 사람이 하는 일이지."
"그럼 왜 거길 간 거야? 어쩔 수 없어서? ...형도 다른 사람을 싫어하잖아?"
마이크로프트는 아무 말이 없었다. 그는 시선을 떨어뜨려 자신의 손에 쥐어진 편지 봉투를 바라보았다. 바스락. 자신도 모르게 주먹에 힘이 조금 들어갔다.
"네가 말하는 '바보들'에게서 자유로워지기 위해선 결국 그들 머리 위에 서야한다, 고 생각하기 때문이란다. 네가 그 자리에 멈춰서있다고 해서, '다른 자들'이라는 존재와 전혀 무관할 수 있다고 생각하니? 아니. 넌 결국 네 의지와 생각과는 없이 다른 자들 입에 오르내릴 거다. '홈즈가의 수치' ...라고."
숨이 막혔다. 멋대로 생각하지 말라고 소리치고 싶었지만 그 말이 차마 입 밖에 내뱉어지지 않았다. 냉혹한 말이 셜록이 피하고 있던 부분을 너무나 아프게 찔러버렸기 때문이리라. 셜록은 제 또래 아이들이 이해할 수 없다는 듯 자신을 보던 눈빛을 떠올려버렸다.
"... ..."
"...네가 가고싶지 않다면 가지 않을 수는 있겠지. 말리지는 않으마. 다만 내 말에 대해서는 한 번 천천히 생각을 해본 후에, 결정을 해도 늦진 않을 거다."
*
기차의 경적 소리가 귓전을 때렸다. 눈을 뜨자 자신은 몇 년 전 부모와 형을 따라왔던 기차역에 서있었다. 마이크로프트에게 그 말을 들은 후 방 안에 웅크려 몇 시간이고 고민하던 셜록은 결국 호그와트에 입학하기로 결심했다. 그는 이제 다른 입학생들이 그러는 것처럼, 학교에서 시키는대로 교복을 준비하고, 망토를 입고, 갖가지 준비물이 든 가방을 든채 기차에 탈 준비를 하고 있었다. 뿌연 연기가 부산스러운 학생들 사이에서 산산히 흩어져갔다.
마이크로프트는 몇 년 전보다 조금 더 키가 크고, 좀 더 당당한 풍채를 뽐내며 셜록의 앞에 서있었다. 마이크로프트의 망토에는, 그가 학교에서 다른 이들의 위에 올라가기 위해 노력한 결과를 보여주는 것 같은 반장 뱃지가 햇빛에 반사되어 찬란하게 빛나고 있었다. 셜록이 자신의 형이 갔던 길을 그대로 따라갈지는 알 수 없는 일이었다. 적어도 그는 형과는 다른 길을 걷고 싶었다. 나의 길을 나아가리라. 그로 인해 결국은 나도 자유로워지리라.
곧 기차가 출발한다는 신호 소리와 함께 학생들이 제각각 부모에게 작별의 키스를 받으며 기차에 몸을 실었다. 셜록 또한 그의 부모들의 따뜻한 키스를 받으며 까만 기차에 몸을 실었다. 자신의 인생의 전환점으로 향하게 해줄 기차였다. 기차가 연기를 뿜으며 천천히 출발하자, 그의 부모가 천천히 멀어져가기 시작했다. 얼마 안 있어 작게나마 보이던 얼굴도 보이지 않게 되고, 멀리서 흔드는 손도 잔상처럼 보이다가 이내 시야에서 사라져버렸다.
마이크로프트는 이미 일찍이 자신의 곁을 떠나고 없었다. 주위를 둘러보자 면식이 없는 아이들 뿐이었다. 그제서야 전혀 모르는 사람들과의, 전혀 새로운 환경에서의 생활이 시작되었다는 게 실감났다. 하지만, 셜록은 아직까지도 그 안에 섞일 마음이 들지는 않았다. 셜록은 왁자지껄하게 떠드는 학생들의 무리를 지나 끝으로, 끝으로 이곳을 벗어나고 싶어하는 사람들처럼 자꾸만 끝으로만 향했다.
한참을 걸은 후 셜록은 마침내 기차 뒷칸에 다다랐지만 그가 바랐던대로 혼자 있을 수는 없었다. 많지는 않았지만 소수의 학생들이 그 칸에 있었다. 벗어나고 싶어도 어차피 자신이 이미 그 기차를 탔다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었다. 셜록은 한숨을 쉬며 남자아이 한 명이 홀로 우두커니 앉아있는 곳 맞은편에 대충 자리를 잡았다.
남자아이가 갑작스런 동석에 흠칫 놀라는 기색이었지만 셜록은 별로 신경 쓰지도 않았고, 신경 쓰고 싶지도 않았다. 짐을 대충 둔 후 셜록은 턱을 괸채 바깥 풍경을 바라보았다. 알록달록한 풍경이 아름답게 그의 시야를 수놓았지만 셜록에게는 숨막힐 정도로 지루한 풍경일 뿐이었다. 어느 정도 시간이 흐른 후에야 셜록은 맞은 편에 앉은 남자 아이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아, 안녕?"
안 그래도 자신의 눈치를 살피고 있었던 건지 남자 아이는 화들짝 놀라며 반사적으로 인사를 건넸다. 셜록의 눈이 빠르게 그의 모습을 훑었다. 뭔가 어수룩한 옷차림과 그의 앞에 놓여있는 허술한 도시락을 보았을 때, 부모님에게 사랑을 받지 못했거나 부모님에게 보살핌을 받지 못하는 처지가 아닐까라는 추측을 할 수 있었다. 그리고, 혼자 있는 걸 보면 지인도 딱히 없는 것일수도 있다.
"혼자 온 건가?"
"아, 응. 아는 사람도 없기도 하고...? 그래서 이렇게 같이 갈 사람이 있게 될 줄은 예상 못했는데 말이야."
"...머글 출신이야?"
그 한마디에 남자 아이는 크게 동요하는 눈치였다. 혼자 왔다는 사실과, 불안한 듯 자꾸만 이곳저곳을 둘러보는 기색에 '이런 환경'에 익숙하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추측을 했었으니까. 머글 출신일 것이라는 추리는 약간의 비약도 있었지만, 어찌 되었든 대충 어림짐작이 맞긴 맞았던 모양이다.
"어떻게 안 거야? 아무한테도 얘기하지 않았는데!"
"뭐... 대충 짐작으로."
"너 되게 똑똑하구나?"
그 한 마디만으로도 감탄이 가득한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며 놀라워하는 모습에, 셜록은 조금 머쓱하게 어깨를 으쓱했다. 평소 이런 소소한 요소를 보고 다른 이들에 대해 파악하곤 했는데, 대개 돌아오는 반응은 감탄보다는 경계심 정도 뿐이었으니까 말이다. 생각보다 그렇게 기분이 나쁘진 않았다. 여전히 셜록은 턱을 괴고 있었지만, 전혀 무관심했던 아까와는 달리 이제는 눈에 흥미를 띈채 건너편에 앉은 아이를 바라보고 있었다.
"조금만 신경 써서 보면 짐작할 수 있는 부분이야."
"그렇구나. 괜찮다면 앞으로 친하게 지내자. 아, 소개가 늦었지? 내 이름은..."
남자 아이가 뒤통수를 긁적이며 멋쩍게 웃었다. 보슬보슬한 밀빛 머리가 그의 손짓에 조금 흐트러졌다.
"존, 존 왓슨이야. 앞으로 잘 부탁해."
6. 사랑의 여섯 가지 색깔
* 몇 회 전력인지 기억이 안 나네요...
* 커플링: 셜존
존은 제 옆에 앉아있는 남자를 바라보았다. 소파를 차분히 두드리는 손가락. 시선을 다시 거두었지만 무언가 다른 쪽에 신경이 쏠릴대로 쏠려있는 건지, 눈 앞의 풍경은 흐릿하게 번져서 명확히 시야에 들어오는 것이 없었다. 결국 자석에 이끌리는 것마냥 다시 옆으로 시선을 돌렸다. 이번엔 그의 손가락에서 조금 더 위로, 살며시 시선을 옮겨보면 늘 그랬듯이 깔끔하게 차려입은 정장, 도드라진 목젖, 턱선, 그리고 굳게 다물어진 입술... ㅡ꿀꺽. 자신도 모르게 침을 삼키고 다시 시선을 돌렸다. 여전히 온 신경과 감각이 한 쪽으로 집중되어있어, 눈 앞에 아까 본 것들이 잔상처럼 남아 너울너울 춤추고 있는 것 같았다.
젠장. 어쩌다 이렇게 된 거야. 대체 어쩌다.
기억을 되짚어봐도 선명하지 않을 뿐이었다. 이 모든 것은 어느 순간부턴가 자연스럽고도 갑작스럽게 그의 마음 속에 스며든 감정이었기에. 심장의 두근거림을 느끼던 첫 날, 존은 부정했다. 입으로, 머릿속으로 연신 자신의 가슴을 속였다. 이건 그저 순간적인 반응이다. 내가 그에게 그런 감정을 느낄 이유가 뭐가 있겠는가? 그저, 그저... 오늘도 어김없이 자신의 지성미를 뽐내는 그의 잘난 모습에 오늘도 감탄을 한 거겠지. 그게 오늘은 다소 과했던 것 뿐.
내가 널, ... ...할리가 없잖아?
그 날을 떠올리자, 자꾸만 옆에서 보이는 손가락의 움직임에 따라 심장이 제멋대로 날뛰기 시작했다. 마치 그 날처럼 쿵, 쿵, 쿵. 몸속에서 뜨거운 무언가가 울리고, 그 열기가 입술까지 미친 것마냥 입술도 바짝 말라왔다. 그 날부터 존은 자주 이런 기분을 느꼈다. 연이은 부정도 결국 진실을 인정하라며 연신 마음을 두드리는 심장 소리에 꺾여버리고 말았다. 늘 끝에 물음표를 달고있던 존의 마음은 어느샌가부터 온점으로 분명하게 마무리되었다.
그래. 어느샌가부터...
나는 널, 사랑하게 되었다.
*
자신의 마음을 결국 인정하게 되었던 그 때에도 상황은 크게 바뀌지 않았다. 존의 심장은 계속 뛰고 있었지만, 반대로 셜록의 심장은 더더욱 차갑고 무디게 느껴질 뿐이었다. 몇 번인가 머릿속으로 그의 마음을 그려본 적이 있었다. 존의 마음은 햇살 같은 노란색과 끓어오르는 불길 같은 붉은색이 섞인 주황색이었다. 붉은색보다는 노란색이 좀 더 섞여있는 따스한 주황색. 예전에 존은 여자들과의 낭만적이면서도 정열적인 사랑을 꿈꾸었던 적이 있었다. 대부분 짧은 시간으로 끝나버리곤 했지만 서로에게 강하게 이끌리던 때도, 살과 살이 맞닿으며 느껴지는 온기도, 품속의 열기도 모두 느껴본 적이 있었다.
지금도 다르지는 않을 것이다. 강렬한 시선이 얽히며 서로에게 이끌리고,그의 손을, 얼굴을 어루만지며 서로의 온기를 나누는 걸 전혀 상상하지 않았던 것은 아니었다. 그의 마음엔 아직도 타오르는 불길 같은 붉은빛이 남아있었다. 하지만... 셜록을 향한 존의 마음은 여태까지의 붉게 타오르는 마음과는 조금 다른 색이었다. ㅡ노란색. 마치 지상에 있는 그 어떤 하찮은 것이라도 따스하게 감싸줄 것 같은 햇빛이 연상되는, 그런 색. 설령 자신 쪽으로 그 마음이 향하지 않더라도, 자꾸만 밀어내려해도 그런 마음까지 감싸줄 수 있는 그런 마음. 생각해보면 어느 순간부터인가 셜록을 위해 많은 것을 포기하더라도, 자신이 희생되어야 할지라도 기꺼운 마음으로 그의 곁에 있었던 것 같다. 그건 어쩌면 자신의 마음을 깨닫게 된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존이 생각해보아도 제 안에서 들끓고 있는 이 마음은 셜록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았다. 각지고 모난 마음 속에 아무리 따스한 색을 채워넣으려 해도 원래 베어있던 어두운 색이 스며들어 탁하게 변해버리고 말 뿐이었다. 존이 그리는 셜록의 마음은 미지의 색이었다. 어느 쪽에도 속하지 않는 회색과도 같은 색. 그는 감정을 배제하려 하지만 비인간적인 것은 아니었다. 어쩌면 누구보다도 인간적인 사람일수도 있겠다는 생각도 더러 했었다.
하지만, 한 가지는 확실하지 않을까? 셜록의 마음은 나와는 같지 않을 것이다. 셜록은 '사랑'이라는 감정과는 어울리지 않아보였다.
셜록이 사랑이라니. 지나가던 마이크로프트가 비웃을 말이군.
여전히 무덤덤하게 허공을 응시하는 그의 눈을 힘겹게 바라보며 존은 씁쓸함이 묻은 시선을 다시 돌렸다. 네 마음이 무슨 색인지는 상관없어. 난 내 마음에서 스멀스멀 스며나오는 붉은색을 노란색으로 묻어버리고 네 마음의 알 수 없는 색마저 감싸안아버릴 거니까. 그렇게 네 곁에, 알 수 없는 네 마음을 언제까지고 그리며 있다면 그걸로 충분할 것이다.
애써 돌린 시야에는 창 밖에서 쏟아지는 햇빛이 가득할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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