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고등학생인 할리가 토니를 만나러 뉴욕으로 갑니다. 시점은 홈커밍 이후, 인피니티 워 이전. 추후 전개될 내용에 인피니티 워 스포일러가 포함될 수 있습니다.
* 아이언 맨3를 기반으로 쓰고 있지만 고등학생 할리가 아직 원작에 나온 적이 없기에 자의적 캐 해석, 캐붕, 날조 주의해주세요! 읽으시는 분들이 생각하는 할리와 많이 다를 수 있습니다.
* 현생에 치이는 상황이라 어벤져스4 개봉 전까지 천천히 씁니다.
토니가 열린 차 문 안으로 미끄러지듯이 들어가 자리를 잡고 앉자 문득 시야에 유려한 선을 그리는 손가락 끝에 자리한 작고 얇은 초승달이 떠올랐다. 얼핏 보면 손가락질이라도 하는 건가 싶었기에 토니는 이 당돌한 꼬맹이가 또 뭘 하고 있나 싶어 미간을 슬며시 좁히며 고개를 기울였다. 그제야 손으로 총 모양을 만들어 자신을 향해 겨누고 있는 할리가 보였다. 토니의 시선이 무심코 손가락 끝을 따라갔다. 문득 현재의 시간에 과거의 기억이 덧씌워진다. 이제는 기억 속에서만 아득하게 들려오는 자비스의 꺼져가는 목소리와 아플 정도로 시리게 맨살에 와 닿던 눈송이, 보온에 그다지 도움이 되진 않았던 낡은 판초까지.
그 날은 유독 추웠다. 회상 속에서 아이언 맨 슈트를 끌고 낑낑거리며 로즈힐의 눈길을 따라 걷던 토니는 어떤 집의 창고 같아 보이는 건물로 무작정 들어갔다. 왜 하필 그 장소에 이끌렸는지는 그때도, 그리고 새삼스레 과거를 회상하는 지금까지도 깊게 생각해본 적은 없었다. 그 이유에 낭만적인 소설이나 드라마에서나 가져다 쓸 법한 ‘운명적’이라는 낯간지러운 단어를 갖다 붙이고 싶지는 않았다. 그는 여전히 운명이라는 비과학적인 개념을 믿지 않았다.
토니는 살면서 과학과 법칙만으로는 완전히 설명할 수 없는 일들을 여러 번 겪어왔다. 그에 관하여 대중에게 드러나는 부분은 극히 단편적인 부분들이었고, 그의 인생은 이미지만큼 화려하고 찬란하지만은 않았다. 지독한 악연, 먼 과거에서부터 이어진 복잡한 인과 관계, 그리고 스스로를 옥죄는 책임감과 죄책감. 이런 속사정을 알았다면 극적인 표현을 좋아하는 이들은 ‘얄궂은 운명’ 같은 타이틀을 붙여놓고 제멋대로 말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하지만 남들이 자신에 대해 무어라 말하든 토니는 운명이니 신세니 하며 한탄하는 스타일은 아니었다. 언제나 과학의 정점에 서있었던 그는 늘 자신의 지식과 능력으로 위기를 헤쳐 나갔다. 녹슬지 않는 무기와도 같았던 과학에 대한 지식은 토니의 사고에서 항상 중심에 위치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 그에게도 ‘비과학적인 무언가’를 믿을 수밖에 없게 된 시기가 있었다. 뉴욕 사태 때 자신이 가진 지식으로는 도저히 설명이 불가능한 ‘마술’을 눈앞에서 목도한 이후론 자신이 인지하고 있는 영역 밖에 더 넓은 세계가 있다는 사실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웜홀 너머로 보였던 미지의 존재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은 잠재의식 안에서 꿈틀거리고 있었다. 어둠 속에서 똬리를 튼 채로 눈을 빛내는 독사는 언제라도 자신의 목덜미를 물어뜯을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실체 없는 두려움 속에서 땀에 잔뜩 젖어 밤중에 혼자 깨어나기도 다반수였다.
그래도 운명 같은 개념은 여전히 그의 테두리 안에 발을 들이진 못했다. 장밋빛 청사진을 그릴 수 없는 토니에게 있어 운명은 역경과 차라리 비슷했다. 무엇이든 그가 부딪히고 극복해야 할 것. 애초에 그 단어를 낭만적으로 써먹을 만한 구석이 자신의 인생에 있었던가. 그에 대한 답은 아직까지는 부정적이었다.
할리네 집 창고에 들어가게 된 것 또한 그런 필연적인 무언가가 아닌, 나름대로 그럴듯한 논리적인 이유를 가지고 있었다. 일단 이 한겨울에 겉옷이라곤 허름한 판초 하나뿐이었고, 거기에 더해서 대놓고 길거리를 배회하다간 토니 스타크가 이런 작은 동네에 깜짝 방문을 했다고 난리가 날 수도 있었다. 평소 관심을 즐기는 편이긴 하지만 로즈힐에서 유명세를 누리는 건 다음 언젠가-그 당시엔 그럴 일은 없을 거라 생각했지만-를 노리도록 하자. 대충 이런 생각의 흐름을 타며 제일 가까이 있던 건물들 중 공구가 있을 만한 곳에 무작정 들어갔었던 것 같다. 사실 그런 것까지 고민할 정도로 여유로운 상황은 아니었으니 직감과 순간적인 판단에 따른 행동이었다는 건 맞지만.
창고에 들어선 토니는 안에 아무도 없음을 확인하곤 비싸고 묵직한 갑옷 정도의 기능만을 가지게 된 마크42를 군데군데 먼지가 내려앉은 소파 위에 앉혔다. 비어있는 슈트의 머리가 어긋난 현 상황을 대변이라도 하듯 옆으로 돌아가 있는 모양을 제자리로 돌려놓은 토니는 온몸에 들어가 있던 긴장을 잠시나마 풀었다. 자비스의 목소리가 들려오지 않을 아이언 맨 슈트 옆에 멍하니 앉아 있자 자신이 오롯이 혼자라는 감각이 무거운 침묵과 함께 어깨를 짓눌렀다.
새삼스러운 일은 아니었다. 외로움은 꼬리표처럼 그의 인생에 늘 따라붙는 감정이었다. 그 꼬리표는 잘라내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지만 자를 수도 없고, 안에 억지로 감춰둬도 이따금 마음에 생채기를 내곤 했다. 혼자 놀 수 있어. 혼자 지낼 수 있어. 혼자 해낼 수 있어. 혼자 이겨낼 수 있어. 혼자, 혼자, 혼자... 잊을 만하면 꼬리를 물고 이어지는 레파토리. 페퍼나 해피가 토니의 곁에 있어주곤 했지만 적어도 그때는 아니었다. 어떻게든 해야 해, 혼자서라도. 기억 속의 토니는 애써 마음을 다잡으려 노력하며 자리를 옮겨 창고에서 찾아낸 핀셋으로 팔에 박힌 파편을 빼내려고 했다. 그때, 갑자기 목소리가 들려온 목소리가 정적을 깼다.
“꼼짝 마요.”
어린아이치곤 꽤 당돌하고 차분한 목소리가 머릿속에서 번져가다가 천천히 흐려졌다. 그리고 얼마 안 있어 다르지만 익숙한 느낌의 목소리가 흐려지는 목소리에 덮어 씌워지듯 토니의 귓가에 파고들었다. 그때도 그렇고 지금도 그렇고, 토니를 현실로 끌어오는 것은 할리였다. 짧은 회상을 끝낸 토니는 그때처럼 능청스럽게 두 손을 들어올렸다. 하여간 시간이 아무리 흘러도 변하지 않는 것도 있다니까.
“Bang.”
겉으로 보기엔 훌쩍 컸는데 알고 보니 속은 그대로인 거 아니야? 예전에 자신을 겨누던 포테이토 건과는 달리 무언가를 깨트릴 화력 같은 건 없어 보이는 작고 무해한 총을 바라보며 토니는 어이가 없다는 듯 작게 헛웃음을 흘렸다. 선글라스 너머로 한쪽 눈썹만 삐뚜름하게 올려 보이며 뭐하냐고 말없이 물어오는 듯한 표정에 장난스러운 목소리가 재차 들려온다.
“이번에도 장난감 총 정도로 생각하는 거예요?”
“장난감 총은 모르겠지만 장난이라는 건 알겠어. 순간 나도 모르는 사이에 또 로즈힐에 불시착한 줄 알았네. 혹시 잊고 있을까 봐 말해두는 건데, 여긴 네 집 창고가 아니라 내 차 안이야, kid.”
토니의 말에 총구처럼 쭉 뻗어있던 검지가 천천히 위로 향한다. 총을 흉내낸 모양은 여전히 유지하고 있는 채였다.
“이 총은 백발백중이에요, 아저씨. 물론 그때 들고 있던 총도 괜찮은 편이었지만요.”
“꼬맹이가 만든 것치곤 얕볼 만한 물건은 아니었지. 근데 이번 건 백발백중은커녕 발전이 없는 것 같은데? 스치지도 않았거든.”
“그건 두고 보면 알 거예요.”
“뭐, 어쨌든 그때 보내준 선물에 대한 감상은 잘 받았어. 개인 이메일을 어떻게 알아냈는지는 굳이 묻지 않을게.”
“아저씨는 팬레터 같은 거 익숙하잖아요. 메카닉 친구가 굴뚝 아래로 떨어트리고 간 크리스마스 선물, 그 뒤로 꾸준히 업그레이드 했어요. 가져오면 피드백도 해줘요?”
입가에 잔잔하게 걸린 미소를 말없이 보던 토니는 눈만 굴려 할리가 등에 멘 배낭을 쳐다봤다. 보지 않아도 가방 안에 들어있을 포테이토 건이 눈앞에 그려지는 것 같았다. 하여간 능청은. 시선을 도로 돌려도 잔상처럼 머릿속에 남는 미소를 눈을 깜박이며 지워낸 토니는 덤덤한 목소리로 물었다.
“그러려고 뉴욕에 온 건 아니지?”
“와. 선글라스에 투시 기능 같은 거 있는 건 아니죠? 물론 그것 때문만은 아니고요.”
“그렇겠지.”
자신의 강연 스케줄이 잡혀있던 박람회에 참석하기 위해 온 것이리라. 제법 규모가 큰 행사였기 때문에 먼 곳에 있는 학교에서도 견학을 올 가능성 또한 충분했다. 토니는 문득 자신이 이곳에 온다는 걸 할리가 미리 알고 있었을지 궁금해졌지만 굳이 그 궁금증을 입 밖에 내지는 않았다. 어차피 알고 있었다고 해도 이상할 건 없는 일이었다. 부드러운 시선이 계속 옆얼굴에 와닿는 것이 느껴졌지만 토니는 고개를 돌리지 않았다. 마음속을 간질이는 가벼운 감도 일단은 무시했다. 무언가 더 있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지금은 그게 중요한 것은 아니었다.
할리의 얼굴에서 거둬진 시선에 문득 백미러가 들어왔다. 당장이라도 속사포처럼 무언가를 묻고 싶다는 걸 말없이 표현하고 있는 해피의 얼굴이 백미러 너머에서 토니를 바라보고 있었다. 해피가 의뭉스러운 표정으로 자신을 보다가 연신 할리가 있는 방향을 힐끔거리는 모양을 바라보던 토니는 속으로 작게 한숨을 삼키곤 선글라스를 벗었다. 결국 토니 스타크가 사고를 쳐서 자신도 모르는 아들이 생겼던 건 아닌가에 대한 단편 드라마 같은 생각의 흐름이 그 동그란 머릿속을 가득 채웠을 게 뻔했다. 불필요한 오해는 종식시켜야겠지.
“네가 생각하는 그런 거 아니니까 운전에 집중이나 해, 해피. 처음 보는 꼬맹이 앞에서 이미지 깨지 말고.”
“무슨 생각 하는지 티 났어요?”
“네가 무슨 생각하는지는 뻔하지. 애초에 이 꼬맹이랑 나랑 닮은 구석이 없잖아.”
아뇨. 닮았는데요? 해피는 간신히 속마음이 밖으로 튀어나가려는 걸 참아냈지만 애석하게도 얼굴에 드러난 표정이 다시 한 번 입보다 앞서간 것 같았다. 미묘해지는 토니의 표정을 알아챈 해피가 다급하게 말을 덧붙였다.
“아니, 뭐랄까. 보니까 둘이 말도 잘 통하고…. 아무래도 이상형이 그런 쪽이시니까…?”
“전 아저씨 친구예요. 근데 토니 아저씨 이상형이 어떤 사람인데요? 금발에 벽안이고 말 잘하는 사람?”
“해피.”
괜히 쓸데없는 말하지 말라는 압박이 짧은 호명에 묵직하게 실린 것을 느낀 해피가 어색하게 헛기침을 하며 대답하기를 무언으로 거부했다. 짧은 침묵이 지나가고 할리가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입을 열었다. 혼잣말인 듯 아닌 듯 미묘한 어조였다.
“역시 이 아저씨가 해피였구나.”
“누군지 알고 있었어?”
“아, 아니. 전 모르는 꼬맹이인데요.”
해피가 운전석에서 대화를 듣다가 질색하며 재빨리 오리발을 내밀었다. 아무래도 퀸즈에 사는 꼬맹이와는 다른 느낌으로 성가신 꼬맹이가 하나 더 늘어난 것 같다. 만난 지 30분도 지나지 않았지만 벌써부터 그런 예감이 강하게 들었다.
“혹시 내가 예전에 해피에 대해 얘기해준 적이 있었던가?”
“아저씨한테 직접 들은 건 아니에요. 토니 옆에서 여러모로 도와주시는 분이잖아요. 좀만 찾아도 이름 나오는데. 그건 그렇고 인사가 늦었네요. 전 할리예요.”
할리의 말은 생각 이상으로 큰 효과를 거둔 것 같았다. 인사를 받아주는 해피는 여전히 말투가 퉁명스러웠지만 한결 누그러진 표정을 짓고 있었다. 토니만큼은 아니어도 자신 또한 인지도가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그간 토니의 곁에서 겪었던 일들이 파노라마처럼 눈앞을 스쳐지나가며 감개무량한 기분을 누리고 있는 모양이었다. 내심 기뻐하는 마음을 감추지 못하고 미세하게 입꼬리를 씰룩거리는 해피를 못 본 척하며 토니는 짧게 생각에 잠겼다.
그래. 요즘은 자신의 이름으로 검색하면 별의별 정보가 다 쏟아져 나오는 시대다. 그렇다고 해서 최소한의 노력도 없이 정보를 얻어낼 수 있다는 건 아니다. 나에 대해서 검색 좀 해봤나? 머릿속을 스치던 생각이 짧은 한 마디로 툭 빚어져 나왔다.
“꽤 잘 아네?”
“요즘은 꼬마 팬들도 타자 치고 글자 읽을 줄만 알면 유명인사의 사생활을 손쉽게 알아낼 수 있는 시대잖아요.”
“그래. 그런데 허락도 안 받고 내 차에 무작정 타고 보는 꼬마 팬은 없었는데.”
“그건 미안해요. 그치만 그렇게 많은 사람들 앞에서 무작정 얘기하고 있을 수도 없었잖아요?”
그리고 전 꼬마 팬이라고 하기엔 아는 게 많아서. 할리가 짧게 덧붙이는 말에 토니의 눈이 가늘어진다. 할리를 만난 이후로 줄곧 느꼈던 의문이 재차 고개를 들었다. 이 녀석, 역시 노린 거 아니야? 토니는 지금까지의 상황이 할리의 의도대로 움직이고 있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 의문이 함의된 눈빛으로 할리를 바라봤지만 할리는 적당히 모른 척하며 어깨를 가볍게 으쓱일 뿐이었다. 의문은 확신으로 굳어졌다. 자신이 눈치가 빠른 편이란 걸 이 꼬맹이가 예상하지 못했을 것 같지는 않은데, 보아하니 눈치를 채더라도 상관없다는 느낌이었다.
의도를 가지고 토니에게 접근하는 이는 언제나 있었다. 그러다 보니 토니도 누군가가 자신에게 접근해오면 으레 무언가 의도를 가지고 있을 거란 생각을 늘 전제로 하고 있었다. 순수한 목적으로 자신에게 다가오는 이들이라곤 사인을 바라는 꼬맹이들 정도였다. 자신의 옆에서 영악하게 파란 눈을 빛내는 꼬맹이 또한 그간 숱하게 만나온 사람들과 비슷한 의도를 가지고 있지 않으리라는 법은 없었다. 하지만…….
‘무슨 생각인지는 모르겠지만 장단에 조금 맞춰주는 것도 나쁘진 않겠지.’
믿음에 확실한 근거는 없었지만 어차피 안 좋은 의도 같은 건 없을 것이라 토니는 예상했다. 뜻하지 않게 찾아갔던 테네시 로즈힐에서의 추억은 생각보다 토니의 마음속에 깊게 뿌리내리고 있었던 모양이다. 서로 도움을 주고받은 사이이기도 하니 나쁘게 생각할 이유도 없었다. 토니는 습관적으로 복잡하게 생각하려던 머리를 차근히 비워나갔다. 견고한 벽을 허물고 제게로 거침없이 다가오는 어린 꼬맹이들을 어떻게 대해야 할지는 여전히 토니에게 풀리지 않은 숙제로 남아있었다. 하지만 쩔쩔맬 이유는 없었다. 그냥 스타크 인더스트리에 견학 온 꼬맹이라고 생각하고 대하면 되는 거다.
“무작정 거기 서서 얘기하고 있을 수도 없었고, 지금 가야 한다고 오랜만에 만난 ‘친구’를 내치기도 좀 그렇긴 했지. 아무튼 엄청 오랜만이잖아? 그렇지? 감동적인 재회 같은 건 이미 글러먹은 것 같지만 차 타고 가는 동안에 비슷한 거라도 해보자고. 숙소는 어디야?”
“음……. 글쎄요.”
“글쎄요?”
“아직 못 정했거든요.”
이게 무슨 소리야? 두 쌍의 시선이 순식간에 할리에게로 모였다. 말로 형언할 수 없는 공기 속에서도 할리는 자신을 향하는 듯 아닌 듯 묘하게 엇나가있던 시선이 똑바로 자신을 향하게 되었다는 게 썩 마음에 들었다. 표정 하나 바뀌지 않고 오히려 웃음기가 더 짙어진 할리를 보며 해피는 이 꼬맹이가 범상치 않다는 걸 새삼 깨달았다. 눈앞에 또 다른 고생길의 문이 열린 순간이었다. 줄곧 평정을 유지하던 토니도 이번만큼은 말문이 막힌 듯 잠시 침묵을 지켰다. 나 참. 짧게 혀를 차는 소리에 헛웃음이 섞여 나왔다. 토니도 결코 녹록하지는 않았다.
“농담이라면 별로 재미는 없는데, 꼬맹이. 이거 히치하이킹에서 더 발전된 수법인가? 네가 다니는 학교에서 단체로 왔을 텐데 숙소 같은 걸 안 잡았을 리가 없잖아.”
“아, 들켰다.”
“그런 게 나한테 통할 거라 생각했어?”
“아직 못 정했다는 건 정말이에요. 대안이 있다면 꼭 거기서 잘 필요는 없는 거니까.”
미소 짓는 가면을 쓴 채 속내를 가리고 있는 소년의 눈빛과 그러한 상황을 직감하고 있으면서 마찬가지로 같은 가면을 쓰고 있는 중년 남자의 눈빛이 허공에서 맞부딪쳤다. 묘하게 숨 막히는 분위기에 끼어들기를 포기한 해피는 말없이 차만 몰고 있었다.
“그 대안이 불가능할 경우엔 어떻게 하려고?”
“차선책을 택해야죠, 가 모범적인 대답이겠지만 사실 생각 안 해봤어요. 불가능할 거란 가정 자체를 안 했거든요.”
무슨 근거로? 의문이 목구멍까지 차올랐다. 결코 길지는 않았던 시간 동안 자신과 함께 하면서 무엇이 이 꼬맹이에게 확신을 갖게끔 하는 걸까. 토니로서는 그 답을 쉬이 짐작하기 힘들었다. 내가 아이언 맨이라서? 단순히 이 꼬맹이가 자신감이 넘치는 건가? 아니, 그 외에 다른 이유가 있을 것이다.
‘우린 연결되어 있잖아요.’
어째서 갑자기 그 말이 생각났는지는 모르겠다.
“알았으니까 말장난은 그만 하자고. 뭘 하고 싶어?”
할리가 기다리고 있었을 말을 해주며 토니는 다시 선글라스를 꺼내서 갈색 눈을 가렸다. 그가 표정이나 생각을 숨기고 싶을 때 종종 나오곤 하는 습관이었다. 이번의 경우는 길게 이어지려는 생각을 억지로라도 차단하기 위한 목적도 있었다. 자신이 원하던 말을 들은 할리는 오늘 만난 이후로 처음으로 어린 티가 나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토니의 질문에 할리는 한 박자 쉬고 창밖을 바라봤다. 로즈힐과는 달리 빽빽하게 건물로 가득 찬 광경을 바라보며 잠시 후 바라보게 될 광경을 머릿속으로 그려본다. 몇 년간 상상하던 곳을 실제로 보게 되는 건 어떤 느낌일까. 몇 년의 시간 동안 짙어진 금발 사이로 햇빛이 부서져 내렸다. 다시 토니를 향해 고개를 돌린 할리가 마침내 입을 열었다.
“아저씨 랩 구경하고 싶어요.”
평소와는 다른 하루가 시작되는 순간이었다. 초대받지 않았던 손님인 할리에게도, 그리고 예상치 못한 손님을 맞이하게 된 토니에게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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